가인과 아벨

2013년 9월 29일

가인과 아벨. 그들은 아담과 하와 부부에게서 태어난 형제였다. 가인은 농사짓는 사람이었고 아벨은 양치는 이였다. 어느 날, 둘은 각각 제사를 드렸다. 가인은 땅에서 난 것으로, 아벨은 양으로 제물을 삼았다. 양은 받아들여졌지만, 농작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왜지? 가인은 화가 났다. 분했다. 이건 차별 아닌가? 아니라면 어째서 ‘날’ 거부하시는 거지?

 

 

 

 

 

 

 

 

편애가 아니다

 

 

 

유명한 이야기 카인과 아벨. 많은 사람이 부모의 편애와 그로 인한 불화로 해석하곤 한다. 존 스타인백의 에덴의 동쪽도 비슷한 맥락이다. 하지만 간과하는 것이 있다. 많은 사람이 범하곤 하는 오류이다. 무엇일까? 어떤 사건이나 물건을 거부하는 것을 ‘나’라는 인간 자체를 거부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들이 거부한 것은 나 자신이 아니다

 

 

 

엄마 생일, 딸이 반지를 선물했다. 엄마는 ‘얘, 다음엔 이런 반지 사오지 마라’고 말했다. 그리곤 다른 딸이 꺾어온 풀꽃은 반갑게 받았다. 또 다른 예. 책을 파는 영업사원이 권하는 전집을 고객이 거절했다. 또 다른 예. 내가 올린 기안은 거부되고 옆 박 대리가 올린 것이 채택됐다. 객관적으로 보면 알 수 있다. 엄마는 딸을 거부한 것이 아니고 고객은 영업사원을 거부한 것이 아니다. 상사는 나를 거부한 것이 아니다. 거부된 것은 반지, 전집, 기획서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흔히 나란 존재 자체가 상대방에 의해 거부되었다고 ‘느낀다’. ‘그들이 거부한 것은 내 제안이지 나 자신이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조차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상처를 받는다. 사실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 오래전, 나도 잠시 영업업무를 담당했던 적이 있었는데, 상사가 늘 하던 당부가 있었다. ‘고객의 거절은 나라는 인간을 거절한 것이 아니라 내가 제안한 그 상품을 거절한 것’이라는 당부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명심하려고 노력하고 이 말에 큰 위안을 얻는다. 객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이들도 역시 마찬가지로 크든 작든 상처를 받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애쓴다. 그것이 일반적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은 카인을 거부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거부한 것은 그의 제물이었다. 그것은 시험문제의 정답이 그것이 아니었기에 틀렸다고 표시된 채 돌려받은 시험지와 같다. 그저 출제자가 원하는 답이 아니었던 것이다. 교사가 시험지에 수없이 많은 문제를 틀렸다고 표시해도 그 학생을 거부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하나님은 옳은 답을 받으시고 틀린 답은 받지 않으신 것이다. 

 

 

 

 

 

구원의 약속과 그 증표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는 답은 무엇이었을까?

 

큰 눈으로 길게 성경을 보면 문제와 답이 보인다. 문제는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들어온 죄와 사망, 그것을 위한 구원방법’이고 답은 ‘흠 없고 순전한 어린 양 예수’ 다. 그렇다. 아담과 하와가 일을 저지른 그 순간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고뇌하셨고 답을 제시하셨다. 흠 없고 순전한 어린 양 같은 자기 아들을 제물로 삼기로 작정하셨다. 그때가 오기까지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소, 양, 염소, 비둘기 같은 동물의 피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언젠가 여인의 후손이 와서 십자가에 못 박혀 자신을 제물로 삼을 것이라는 구원의 약속을 잊지 않게 하려는 상징적 의식이기도 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떠날 때 하나님이 손수 지은 동물 가죽 옷을 입고 나왔다. 가죽을 얻기 위해서는 동물의 희생이 있어야 한다. 몸소 이를 겪은 아담과 하와가 자신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구원에 대해 가인이 알아듣도록 교육을 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가인이 알고도 무시하고 마음대로 농산물을 제물로 바쳤는지는 내가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아벨이 제대로 된 답안지를 쓴 것을 보면 교육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하여간 가인은 자의적으로 해석했다. 자의적 해석은 그 기준이 어디에 있나. 자기 자신에 있다. 믿는 자의 주인은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일 진대, 자기가 기준이 된다는 것은 교만이고 이것은 또 다른 죄를 낳게 된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기준이 되고 내가 주인이 되니 내 제안이 거절되었을 때 거부당한 것은 내 제안이 아니라 나 자신이 되어 버린다. 그러기에 상처를 받고 분을 내게 된다. 

 

 

 

 

 

 

 

살인, 그 결과

 

 

 

분하다고 느끼게 되면 어딘가 분풀이를 하고 싶어진다. 보통 이것은 분을 내게 한 상대가 아니라 자기보다 약한 자를 향해 발산하게 된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그 분출대상으로 삼았다. 가인은 아벨에게 들로 나가자고 했다. 그리고는 들에서 아우를 돌로 쳐 죽였다. 아벨만 없어지면 자기가(자기 제물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지 아니면 그저 얄미워서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여간 그는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다.

 

 

 

하나님은 가인을 불렀다. 그 옛날 아담을 불렀던 것처럼.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몰라서였을까? 아니다. 그것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는 가인의 대답에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알 수 있다. 잘못한 뒤에 부르실 때는 자복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다. 하지만 아벨은 또다시 기회를 외면했다. 사실 아벨을 죽이기 전에 하나님께선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셨다. “네가 분하여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의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께선 가인이 곧 일을 저지를 상태라는 것을 아셨나 보다. 죄를 짓고자 하는 마음, 죄에 가까워진 마음을 다스리라고 하셨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나느니라고 하셨던 말씀과도 통한다. 하지만 가인은 이 말씀을 듣고도 아벨을 죽였다. 마음을 지켜 죄를 다스리지 못했다. 

 

 

 

가인은 살인의 대가로 죽임을 당했을까? 그렇지 않다. ‘밭을 갈아도 땅이 그 효력을 주지 않고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었다. 오늘날의 형벌에 비교해도 가볍다. 하지만 가인은 그것도 너무 무겁다고 했다.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고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일까 겁이 나서’였다. 하나님께선 그렇지 않다고 하셨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셔서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셨다. 가인은 야훼 앞을 떠나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며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후손은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 수금과 퉁소를 잡는 음악가의 조상, 구리와 쇠로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 가인의 후손 가운데에서 두 번째 살인자가 나왔다. 라멕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한 소년을 죽였고 스스로 선언했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뻔뻔스러워지고 죄악이 관영하는 세상이 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