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의 추억과 그 상징성에 관하여

2016년 7월 2일

라면의 추억과 그 상징성에 관하여

 

어린 시절 라면의 추억

작가 김훈에 따르면 라면은 1963년에 처음 나왔다고 한다. 내가 태어나기 불과 2년 전이다. 어렸던 시절, 우리 집은 아주 오래된 한옥이라 늘 시시로 고쳐야 했다. 장마철이 되기 전에 기와며 하수도를 살펴 비가 새거나 넘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했고, 추운 겨울이 오기 전엔 구들장을 살펴야 했다. 그 사이사이 목수며 미장이들이 드나들며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이곳저곳을 손봤다.

그렇게 집을 고칠 때마다 새참이나 점심을 내는 것은 빠질 수 없는 일이었는데, 일하는 아저씨들이 선호하는 메뉴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라면’이었다. 요즘은 개당 가격이 2천 원 가까이하는 라면이 나왔음에도 라면은 저급한 음식으로 치부되고 있다. 만에 하나, 일꾼들에게 라면을 제공하려 치면 큰 반발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사할 때 경험에 의하면 라면은커녕 짜장면이나 기타 중국 음식도 싫어했다. 제일 좋아하는 것은 현금을 드리고 알아서 드시라는 거고, 그다음은 백반을 시켜드리는 것이었다. 이해할 수 있다. 밥을 기본으로 해서 여러 가지 반찬을 골고루 먹어야 힘을 내서 일을 할 것이 아닌가. 라면이야 그때뿐, 두 시간이면 배를 훅 꺼트리니 일할 때 먹는 음식으로는 적당하지 않다.

그럼, 그때 그 시절엔 어째서 라면에 그토록 환호했을까? 처음 느껴보는 MSG의 황홀함? 새로운 것을 먹음으로써 누리는 트랜디함에 편승하는 그 느낌 때문이었을까?

 

라면의 추억과 그 상징성에 관하여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일하는 분들이 와서 일하는 날은 라면 냄새가 나는 날이었고 한 젓가락도 먹지 못하면서 군침만 흘리게 되는 그런 날이었다. 십 원짜리나 백 원짜리 몇 장을 가지고 집 앞 구멍가게에 라면 심부름을 간다. 뽀스락 반짝거리는 주황색 라면 봉지를 들고 달려오면 엄마랑 일하는 언니는 냄비 속에서 펄펄 끓고 있던 물에 면과 스프를 넣고 라면을 끓인다. 하얗고 새파란 대파를 쑹덩어슷 썰어 넣고 달걀을 풀어 넣는다. 평소 우리 집에선 맡을 수 없었던 황홀한 냄새가 온 집안에 퍼진다. 일하는 아저씨들이 한데 모이고 “어, 시원하다” 감탄을 연발하며 라면을 들이켜듯 흡입한다. 면을 다 건져 먹은 다음 밥까지 풍덩풍덩 말아먹는 그 모습이 얼마나 탐스럽고 나마저 먹고 싶던지.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대였을 뿐 내 입에 들어온 적은 없었다. 딱 한 번 먹어본 적 있었는데, 상상도 경험도 해보지 못했던 그런 맛에 충격받았던 것이 기억난다. 그 뒤론 오늘도 혹시나… 하면서 닭이랑 달걀이 그려져 있던 것으로 기억하는 주황색 스프 봉지를 손에 들고 아직 끄트머리에 붙어있는 스프가루를 손가락 끝으로 꼭꼭 찍어 빨아먹곤 했었다.

이런저런 겉절이나 열무김치를 수북이 담고 노란 양은냄비에 펄펄 끓은 라면을 내어가는 것을 보노라면 왜 그렇게 흥분되던지. 기대와 실망이 끝도 없이 되풀이되던 것이 어린 시절 라면에 얽힌 내 감상이다. 그땐 라면이 몸에 나쁘다 좋다 하던 것도 이야기되지 않던 시절인데 왜 우리 엄마는 내게 라면 한 봉지 사서 끓여주지 않았을까. 왜 인부들 라면 낼 때 한 젓가락 따로 덜어 주지도 않았을까. 분명 조르다 조르다 왜 안주냐고 물어봤을 텐데 그 답이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 생각해보니 할머니가 하는 살림에 맘대로 돈을 쓰지 못했던 까닭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맛있는 라면은 어떤 라면인가

이제 라면쯤은 돈 걱정 없이(흐흐…) 먹을 수 있고 말리는 사람도 없는데, 오히려 라면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라면은 맛있지만 가장 맛있는 한도는 딱 두 젓가락. 거기까지다. 그래서 남의 라면 뺏어 먹는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면을 먹어야 할 때가 있고 생각날 때도 있다. 그럴 땐 어떻게 먹는게 가장 맛있을까. 내 취향은 극과 극인데, 아무것도 넣지 않고 끓이거나 넣더라도 대파 딱 한 가지만 넣고 끓이는 게 최고다. 국물은 어차피 잘 먹지 않으므로 물과 스프의 양은 줄이고, 꼬들꼬들하고 탱탱한 면발을 좋아하니 센 불에 짧은 시간 파르르 끓여 불을 끈 다음 뚜껑을 덮고 잠깐 뜸을 들인다. 한편 이와는 반대로 뭘 넣으려면 아주 호화로운 토핑을 선호한다. 물오징어, 새우 등의 각종 해산물과 양파, 대파, 콩나물을 넣고 끓인 짬뽕스러운 라면도 좋아한다. 몸서리치는 캡사이신의 화끈한 매운맛… 이런 건 싫어하니 그저 집에 있는 말린 고추나 고추 가루로 고추기름 내는 정도가 내겐 맞다.

 

최근 먹었던 맛있는 라면

원래 어울려 먹는 것을 좋아하고 요즘 흔히 말하는 혼밥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식당에 뭘 먹으러 들어가는 일도 거의 없다. 더욱이 라면은 반 개까지를 맛의 최고점으로 느끼는 나로서는 분식집에 혼자 들어간다 해도 라면+김밥, 혹은 라면+주먹밥의 하모니를 느끼기엔 위가 작아 라면만 먹게 되니 아쉽다.

하지만 온전히 라면만 먹었는데도 맛이 줄지 않고 끝까지 감탄했던 곳이 있었는데, 바로 삼청동에 있는 ‘라땡’이다. 라면이 땡기는 날을 줄여서 라땡이라고 한다는데, 오래된 한옥 대문을 열고 들어가 쥔 할머니가 끓여주시는 콩나물 가득 담긴 해장 라면이나, 체다 치즈 한 장 얹어 진한 국물맛을 내는 치즈 라면을 먹는 맛은 종종 집에서도 불현듯 생각나 차를 잡아타고 그 골목으로 달음질치려는 충동을 일으키곤 한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막내가 한턱낸다며 전날 내린 눈이 꽁꽁 얼어붙은 길을 위태위태 미끄러지며 데려간 그 라땡의 라면 맛은 정말 일품이었다. 2천 원, 3천 원에도 귀한 진미를 대접받은 것만 같은 감사함. 그래서 더 맛있었나. 친한 친구, 편한 사람들과 함께 이것저것 주문해 작은 뷔페를 즐기는 기쁨. 김떡순을 먹든 라볶이를 먹든 느껴지는 행복. 내가 좋아했던 것은 라면 자체가 아니라 여럿이 나누는 혼면渾麵의 즐거움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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