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2008년 7월 31일

소녀는 담장 벽돌 틈사이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보들보들한 벨벳같은 녹색이끼가 느껴졌다. 비가온지 며칠 되지 않아 촉촉했다. 그 느낌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하지만, 비가 내리지 않고 몇 날이 지나면 이것도 촉촉함을 잃고 까실까실해지겠지. 아빠 턱수염만큼은 아니지만. 벽돌사이에 패인 홈을 따라 손톱을 세우고 주욱 밀어내면 이끼는 도로롱 말리면서 벗겨진다. 그 재미에 소녀는 혓바닥을 입술새로 샐쪽 내민채 열심히 열심히 꼼꼼하게 이끼를 밀어내는 일에 집중했다. 

“애, 너 뭐하니?” 
이끼를 말아 떨어뜨리던 일에 빠져있던 소녀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제법 뜨거운 햇빛아래라 얼굴은 벌겋게 익고 귀밑머리를 따라 땀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방해받은 소녀는 인상을 썼다. 
“또 쓸데없는 짓을 하는구나. 뜨겁지도 않냐? 햇볕에서.”
아이 보는 언니는 이상한 아이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높은 문턱을 넘어 대문 안으로 사라졌다. 소녀는 땅바닥을 보았다. 자기가 무심코 담벼락에서 벗겨낸 이끼들이 새카맣게 죽은채 수북이 쌓여있었다. 보들보들한 초록 벨벳 아랫쪽은 끈적이다고 해야할까 아님 미끈덩거린다고 해야할까 아뭏든 시꺼먼 것들이 담과 이끼를 이어주고 있었다. 손을 내려다 봤다. 손톱밑이 새까매졌다. 할머니한테 꾸중듣기 전에 얼른 씻어야겠다. 아까 언니가 들어갔던 대문 안으로 냉큼 뛰어들어갔다. 

한 길도 넘는 깊이의 우물물은 컴컴한 저 아래서 시커멓게 혹은 시퍼렇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까마득한 심연. 확실히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만, 이 깊은 우물을 보고 있으면 어디선가 읽었던 그 말이 생각난다. 심연. 어쩐지 끝이 없다는 느낌이다. 저 아래는 끝도 없이 깊고 한 없이 깜깜하겠지. 저기로 빠진다면 무서운 속도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은 아닐것 같애. 눈을 감았는지, 아니면 떴는지 모를 그런 분간안될 어둠속으로 천천히, 천천히 반쯤은 둥둥 떠있는 느낌으로 빠져들어가겠지. 한 없이 한 없이… 
아냐, 아주 끝이 없진 않을꺼야. 어느 순간 다시금 빛이 나타나고 그럼 그 안으로 홱 빨려 들어가서는 다른 세상으로 갈지도 몰라. 혹시 모자장수와 토끼와 들쥐가 차 마시는 자리에 초대받게 될지도 모르지. 그렇담 난 앨리스와 함께 차를 마시게 될까, 아님 내가 앨리스가 되는 걸까? 
소녀는 킥킥 웃으면서 상상의 세계에서 벗어나 두레박을 던져넣었다. 
쏴아. 대야에 물을 쏟아부었다. 사방으로 물이 튀어 나비무늬가 새겨진 청록빛 플라스틱 슬리퍼를 신은 소녀의 발을 적셨다. 손을 씻기전에 얼굴부터 씻었다. 푸푸푸. 얼음같은 물이  달아오른 뺨을 식히고 목덜미의 땀기를 닦아냈다.  기분 좋다. 이상하지? 이렇게 찬 물이 겨울이면 미지근해지니말야. 옆에있는 헌 칫솔로 손톱밑도 싹싹 씻어 말끔해지자 맑은 분홍빛 손톱이 빛난다. 

소녀는 만족하게 웃으며 마루쪽으로 뛰어갔다. 
“할머니, 수박~~”

댓글 없음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