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2

2008년 7월 31일

여름은 참외며 토마토, 수박 등등 먹을 것들이 지천이라 흐뭇하다. 날이 더워져 겨드랑이 촉촉이 젖을 무렵이 되면  찬합에 밥이며, 과일을 싸가지고 가는 데가 있다. 오늘도 보자기 안에는 불고기며 나물, 여러가지 전 나부랭이들이 차곡이 담긴 찬합이 있다. 또 하나, 할머니가 꼭 챙기시는 게 있다. 꽃이다. 장미같은 꽃나무와 꽃삽, 전지가위 등이다. 이렇게 먹을거와 꽃을 챙기면 신이 나야 할 텐데, 꼭 이맘때 가는 나들이는 분위기가 수상하다. 왠지 조용한 것이 차분히 가라앉아 까불어제낄 분위기가 아닌 것이다. 

자동차는 어느새 한강을 건넌다. 쇠로 된 다리를 지나간다.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와 머리카락도 날리고 미식거리던 것도 날려보낸다. 나는 바람을 더 느끼려고 창밖으로 손을 내민다. 
“밖으로 손내밀지 마라. 다친다. “
“어떻게 다쳐”
“다른 차가 부딪히면 어떻하니?”
차 안으로 손을 쏙 집어 넣는다. 내 손이 잘라지면 큰일이지. 부시럭부시럭 검통에서 얇은 만화책을 꺼낸다. 이 검엔 판박이도 있고 만화책도 있다. 검도 씹고 만화도 보고, 맘에 드는 데에 판박이도 문질러 그림을 새긴다. 지금은 택시 안이라 문지를 데가 마땅치 않다. 손등에다 문지른다. 판박이 얇은 종이를 지들끼리 붙지않게 잘 펴는게 중요하다. 문지르다 보니 속이 다시 안좋아진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얼마 안되어 도착한 목적지. 큰 철문앞엔 군인 아저씨들이 지키고 있고, 그 둘레엔 사슴무늬가 예쁜 쇠울타리가 둘러져있다. 그 안에는 둥글둥글 모양을 낸 향나무도 있고,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것 같은 버드나무도 있다. 여기서부터는 걸어야한다. 
조용하다. 
함께 가는 사람들의 숨소리나 타박거리는 발소리만 들린다. 여기오면 한숨들도 많이 쉰다. ‘휘유-‘ 하고.  
푸드덕하고 새가 날더니 깍깍 까치가 운다. 우리가 왔다고, 손님이 왔다고 알려주나보다. 손님이 와도 여기 주인들은 일어서 맞으러 나올줄을 모른다. 끝간데 없이 줄 맞춰 세워진, 햇살을 받으면 눈마저 부신 하이얀 돌비석들 아래 잠들어있다. 나라를 위해 죽은 국군아저씨들은 지금 잠들어있다. 죽으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는 거다. 자고 자고 또 자다가 때가 오면 일어나 하늘나라에 가는 거다. 그때까진 저어 쪽에 있는 사람들 처럼 와서 시끄럽게 울고 몸부림을 쳐도 그냥 잠만 자야한다. 

‘육군 대위 이 성하의 묘’
할머니는 물수건으로 비석을 닦는다. 마치 땀흘리고 먼지 묻은 아이를 닦아 주는 것 처럼 깨끗한 물수건으로 비석을 닦는다. 아빠는 돗자리를 깔고 향불을 붙인다. 바람이 불어 라이타 불이 자꾸만 날라가니까 한 손으로는 바람을 막고 기다린다. 불이 제대로 붙으면 향을 흔들어 불꽃은 없애고 담뱃불 같은 불씨만 남긴다. 향냄새가 곱다. 군데군데 다른 비석 앞에도 향불은 있지만, 우리 집에서 가져온 향내가 제일 좋다. 우리 식구들은 울지 않는다. 엄마랑 형님이랑 와서 울면 삼촌도 맘이 아프겠지. 모두 비석 앞에 와 서서 고개를 숙인다. 말 없이 가만히 기도한다. 비석 옆에 장미나무를 심고 둥글게 아치를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말이 없다. 너무 조용하면 좀 이상하다. 조용한 것이 이불처럼 가만히 나를 누르는 것 같으니. 나무에 물을 주고 밥을 먹는다. 온갖 맛난 것을 싸와서 먹으면서도 역시 말이 없다. 

뻐꾹 뻐꾹.
뻐꾸기가 운다. 여기서는 새들도 노래하지 않는다. 모두 다 운다. 신나게 노래하면 혼날지도 모르니까. 처량맞게 뻐꾹거리니까 우는거지. 
나도 조용히 뛰어다닌다. 까불어도 입 다물고 까불면 혼나지 않는다. 후후. 
뛰어다니다 지친 소녀는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눕는다. 할머니가 가만히 이맛전을 쓰다듬어 주신다. 좋다. 잠이 솔솔 올것만 같다. 
빰~빰~빠바바~~
어디선가 나팔 소리가 들려온다. 작은 소리가 아닌데도 조용함을 깨지 않는 묘한 나팔소리다. 이 나팔소리에 다들 잠을 깨지 않고 자는지도 모르겠다.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흘러간다. 파란 나뭇잎들 사이로 바람이 산들 불어온다. 살풋 땀이 뱄던 이마가 시원해진다. 여름이다. 슬프도록 조용한 여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