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과 하와

2012년 11월 6일

선하게 창조된 아담

 

첫 사람 아담은 선하게 창조되었다.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직접 빚어 지으셨고, 하나님의 생기를 그의 코에 불어넣으셔서 영적인 생명체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다. 다른 것들은 모두 ‘번성하게 하라, 새가 날으라, 종류대로 내라’ 하고 말씀으로만 창조하셨지만 오직 인간만은 흙으로 지으시고 당신의 숨결을 그 코에 불어 넣으셨다. 이것은 우리가 영혼을 가진 존재이며 기도가 믿는 자의 호흡이 될 수 밖에 없는 근원적 이유기도 하다. 인간은 태생부터 선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하나님께선 그를 에덴동산으로 이끌어 오셔서 그곳을 관리하고 지키게 하셨다. 에덴은 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 네 강의 발원지로 이 강들은 아라비아와 아프리카,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둘러흐르며 그 땅을 적셨다. 유브라데는 티그리스강과 함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양대 젖줄로 학교에서 배우던 유프라테스강이고, 비손은 금이 풍부한 하윌라 땅을 흘렀다. 주위를 둘러보면 금은방의 이름으로 ‘비손’이 쓰이는 것을 가끔 볼 수 있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일까. 첫 사람 아담은 에덴을 맡아 관리하고 지키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모든 것을 누리되 소유하지 않고 내 소유가 아니되 하나님을 위해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의 사명은 이때부터 생기게 되었나보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에덴동산에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마음대로 먹어도 되지만 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다.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다. 이것이 그가 지켜야 할 첫번째이자 유일한 계명이었다. 하나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허용되는 규칙이라니 얼마나 매력적이고 지키기 쉬웠을까. 형법, 민법, 상법… 심지어는 교통법규까지도 없었다. 하나 빼고는 모든 것이 허용되는 완벽한 자유. 아담은 그런 자유를 누렸다.

 

 

 

아담의 첫번째 임무

 

아담이 에덴에서 수행한 첫 번째 임무는 짐승들의 ‘이름짓기’였다. 하나님이 흙으로 지으신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아담 앞으로 이끌어 가셨고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바로 이름이 되었다. 간단해 보이지만 만만하지 않은 – 사실 엄청난 일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생물들이 멸종되거나 멸종의 위기를 맞고 있다. 제국주의가 판을 치던 시절 여러 나라들이 식민지를 착취하면서 그곳의 동물들도 마구잡이로 잡았고, 환경오염으로 더 많은 종의 생물들을 이젠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기도 했다. (>>위키피디아/멸종된동물목록) 막 만들어진 그 시기엔 얼마나 다양한 생물들이 세상을 가득 채웠을까. 아담이 각각의 종(species)들의 이름이 아니라 종류(kinds)의 이름만 지었다 할지라도 수 천개는 되었을 텐데 행진하는 동물들의 이름을 그 자리에서 겹치지 않고 지었다는 것을 보면 그의 지능은 적어도 평범한 현대인 보다는 높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기야 하나님께서 직접 지으시고 숨을 불어넣으신 존재인데 까마득히 멀리 떨어진 후손인 우리들과는 겉모습으로나 내면으로나 비교하는 것이 무리일지도 모른다.

 

 

 

돕는 배필 하와

 

하나님께선 처음 사람을 지으셨을 때 남자를 먼저 만드셨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하셨다.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갈빗대를 하나 뺀 다음 살로 그 자리를 채웠다. 그의 갈빗대로 만든 사람을 아담 앞으로 이끌어 오셨다. 아담이 말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왜 하필이면 갈비뼈로 만드셨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흔히  이야기되는 이유가 있다. 머리뼈로 만들면 여자가 남자 머리위에 올라가 다스리려할 테니 안되었고, 다리나 발뼈로 만들자니 남자가 여자를 아래로 두고 지배하려할 테니 그것도 안되었다. 가슴에 있는 갈비뼈로 만들어 마음으로부터 서로 사랑하게 하였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정설은 아니겠지만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다. 남녀는 서로 모자란 점을 채워주고 도우며 사랑할 존재이지 위에 있거나 아래 있거나 하는 대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자는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겨자씨만한 의심 하나가…

 

예수님께선 겨자씨만큼 작은 믿음만 있어도 산을 움직일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런데 에덴 동산에선 그만큼 작은 의심 하나가 하나님과 사람을 십자가 사건이 있기까지 갈라놓았다. 

 

하나님이 지으신 짐승중에 가장 간교한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뱀이 말을 했다. 하나님의 숨이 불어넣어지지 않은 뱀은 사람과 같은 영적인 존재가 아닌 짐승에 불과하므로 말을 할 수 없어야 했다. 하지만 간교한 뱀은 이미 사탄에 장악되었기에 말을 할 수 있었다. 사탄은 욥기(욥1:5~7)에 보면 하나님과 그 아들들이 모인 자리에도 가고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니기도 한다. 에덴동산이라고 들어가지 못하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어쨌든 ‘참으로’, ‘너희에게’, ‘모든 나무의 실과를’ 이렇게 이중삼중의 장치를 걸어놓은 뱀의 말에 여자는 그냥 당하고 말았다. ‘참으로’란 말에 움찔했고 ‘너희에게’란 말로 여자의 의견은 사람 전체의 대표의견이 되어 버렸으며 ‘모든 나무’란 말을 부정하다보니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하고 쓸데없는 강조를 하고 정작 필요한 부분은 왜곡하므로써 자가당착에 빠지게 되고 말았다. 따라서 뱀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하는 거짓말에도 당당히 부정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 말에 넘어가 버렸던 것이다. 

 

뱀이 말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뱀은 더 나아가 하나님을 인간의 성장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옹졸한 존재로 폄하하여, 흔들리던 여자의 마음에 결정적인 의심의 씨앗을 심었다. 사탄은 여자의 마음에 의심 뿐 아니라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시기와 교만도 심었다. 

 

여자는 그 말을 듣고 그 나무를 보았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였다. 방금 전까지 무심히 보던 나무가 아니었다. 여자의 눈이 ‘밝아진’ 것이다. 선악과를 먹기도 전이었는데 뱀의 표현에 의하면 눈이 밝아져버린 것이다. 사실은 지금 보는 이 나무가 늘 보던 그 동산 중앙에 있던 그 나무였는데도 그저 달리보이는 것은 내 안에 생긴 욕심이 내 눈을 가렸기 때문인데도 이미 욕심에 사로잡힌 마음으로는 모르던 것을 ‘깨달은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야고보서 1:15)고 했고, 교만이 패망의 선봉이요 넘어짐의 앞잡이(잠언 16:18)라고 했던 것이다. 

 

여자는 그 열매를 따 먹고 남편에게도 주었다. 남편도 먹었다. 먹은 결과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다. 아담은 선악과에 대한 경고를 하나님으로 부터 직접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자가 주는 선악과를 먹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아내를 안타까워 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대신 선악과를 먹어버렸다.  아담은 하나님보다 아내를 더 사랑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섬기고 제사지내는 대상으로서의 조각상만 우상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우상이다. 사랑하는 것이 모든 행위와 판단의 기준이 되고 우선순위의 첫 머리에 올리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돈이나 권력을 사랑하여 섬기고 아내나 남편을 섬기고 자식을 섬기기도 한다. 아담도 같은 잘못을 저질렀는지도 모른다.  

 

달라진 것이 또 하나 있다. 벗은 몸에 대한 인식변화가 그것이다. 처음 만날때도 방금 전에도 그들은 벗고 자신의 전부를 상대방에게 드러내고 있었다. 벗은 것은 내 자신을 모두 보여주는 것이다. 숨길 것이 없을 때 내 전부를 드러내도 부끄러움이 없고 당당할 수 있다. 하지만 내게 부끄러운 것이 있다면 숨기고 싶어진다. 한편 서로에게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확신한다면 설사 내게 부끄러운 점이 있다해도 솔직할 수 있다. 하지만 믿음이 흔들리면 치부는 역시 가리고 싶어진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흔들리자 서로에 대한 믿음도 흔들리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막혀버린 관계

 

하나님은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을 거니셨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 아내는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동산 나무 사이로 숨어버렸다. 자신들의 창조주, 아버지 그리고 유일한 친구인 하나님을 반갑게 맞는 대신 피해 숨게 되다니. 사람은 찔리는 구석이 있으면 차마 그 사람을 볼 수 없게 된다. 아담과 하와는 그들에게 유일하게 부여된 규칙을 깨트려 버렸으니 하나님을 뵐 낯이 없게 되었고 그들은 유일한 친구이자 아버지, 창조주를 가까이 할 수 없는 천하에 외로운 존재가 되어버렸다.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셨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부르셨겠는가. 비록 아담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말씀을 어겼지만 자기 변론의 기회를 주고자 함이 아니셨을까. 아담이 대답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배우자에게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부모에게는 두려움을 느끼는 존재가 되었다.

 

다시 하나님이 물으셨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아무도 아담이 벗었다고 말해준 이는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내가 말씀을 어기고 먹었기에 ‘내 잘못’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부모들은 자식이 잘못했을 때 뻔히 알면서도 묻는다. ‘누가 이랬어?’ 이때 기대하는 것은 ‘잘못했어요’ 한 마디다. 그 다음 단계는 ‘네가 그랬니?’지만 이 때도 역시 ‘제가 잘못했어요.’라는 말이다. 적어도 ‘엄마 때문에 그랬어요’ 나 ‘아빠 때문이에요’이런 말은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담은 하나님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이 말은 무슨 말인가. ‘그래요. 제가 먹긴 먹었어요. 하지만 내가 그러려고 그런게 아니라 여자가 줬으니까 먹었죠. 근데 그 여자는 하나님이 보내주셨잖아요.‘ 그러니까 제 잘못은 없고 여자때문이고 하나님 때문’이란 말이 아닌가. 

 

하나님이 여자에게 물으셨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대답했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동생은 형을 따라하기 마련이고 나쁜 짓은 더 잘 따라한다. 여자는 아담이 한 그대로 따라 대답했다. 뱀 탓으로 돌렸다.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셨다. “네가 이런 짓을 하였으니 모든 가축과 들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지금부터 배로 기어다니고 죽을 때 까지 흙을 먹을 것이다. 내가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겠다.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며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하나님이 여자에게도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다. 진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 것이고,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

 

뱀과 여자에게 말씀하시고 나서 아담에게도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먹지 말라고 한 과일을 먹었으니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고 너는 평생 수고해야 땅의 생산물을 먹게 될 것이다. 땅은 너에게 가시와 엉겅퀴를 낼 것이며 너는 들의 채소를 먹어야 할 것이다. 너는 이마에 땀을 흘리며 고되게 일을 해서 먹고 살다가 마침내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것은 네가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너는 흙이므로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사람이 수고하고 고통 중에 살아야 하는 모든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임신과 출산이라고 에덴에서 없었을까마는 그 과정이 고통을 동반하게 되었다.  아담도 가장으로서 먹고 사는 문제를 책임짐에 있어 종신토록 고되게 수고하여야 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선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고 에덴에서 내보내셨다. 가죽옷을 지으려면 짐승의 가죽이 있어야 하고 짐승의 가죽을 얻기 위해서는 적어도 짐승 하나는 죽어야한다. 이것은 성경 최초의 죽음이었다. 완벽하게 보호받던 에덴에서의 생활과는 달리 세상의 삶이란 하나님의 보호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그렇다. 또한 피흘리는 죽음 없이는 인간의 잘못을 덮을 수 없다. 먼 훗날 어린양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은 이제까지의 모든 죄와 앞으로의 모든 죄를 단번에 영원히 용서하고 인간을 구원하셨다. 짐승의 죽음과 가죽옷은 우리를 그저 버려두지 않으시고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 보혈을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