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이야기 9, 자식은 부모의 웃음-이삭

2014년 6월 15일

아브라함이야기 9, 자식은 부모의 웃음-이삭

이삭, 태어나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이삭이 태어났다. 사라와 아브라함은 이삭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삭은 웃음이라는 뜻이었다. 오랫동안 기다린 아들이었다. 아브라함이 백 살이 되었으니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온 자식이었을까. 자식 하나 없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기쁨과 웃음을 가져다 주셨다.

쫓겨나는 이스마엘

이삭이 무럭무럭 자라 젖을 떼게 되던 날, 아브라함은 큰 잔치를 베풀었다. 이 잔치에서 사라는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장면을 목격하고 아브라함에게 말해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고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도록 하게 했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다 가죽 부대의 물이 떨어지자 죽을 수 밖에 없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장성하여 활 쏘는 자가 되었고 바란 광야에 거주할 무렵 애굽 아내와 결혼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렸던 것은 이 날이 처음이었을까? 그날처럼 큰 사건은 아니었을 지라도 지속적인 괴롭힘은 있었을 것이다. 둘의 터울은 14살이나 된다. 열 다섯에 이삭이 태어났다면, 이스마엘은 15년간을 아브라함의 독자로 살아 왔을 것이다. 그러다 적자 이삭이 태어나자 그 지위는 곤두박질치고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하갈과 사라의 처첩간의 알력과 피해의식은 스스로 느끼는 박탈감 이상으로 강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14살이나 많은 이스마엘에게 젖먹이 이삭은 상대도 되지 않았을 텐데, 과연 어떻게 놀렸을까? 원문에 나오는 ‘차하크’란 말은 단순한 놀림이 아니라 위험이 뒤따르는 폭력성 있는 장난이나 성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어느 쪽이 되었던 사라로서는 이스마엘을 이삭에게서 떼어 놓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하갈 입장에서는 아쉬울 때는 씨받이로 쓰다가 필요 없게 되니 내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지만 사라로서는 이스마엘이 괘씸함을 넘어서는 위험인물로 보일 수 밖에 없었지 않나 생각된다.

 

네 아들을 번제로 드려라

백 살에 낳은 아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 부모의 기쁨이 된 아들. 귀하고 소중한, 더할 나위 없이 보배로운 그런 아들 이삭.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이삭. 그런 이삭과 아브라함에게 큰 시련이 닥쳤다. 믿음의 조상이 되어야 했기에 아브라함이 겪어야 하는 시험은 남보다 더 클 수 밖에 없었다. “아브라함아” “내가 여기 있나이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라. 산에 올라 내가 일러주는 곳에서 그를 번제로 드려라.” 주실 때는 언제고, 이제는 이 귀한 아들을 데리고 산에 가서 번제로 드리라니. 믿어지지 않는 말이었지만 아브라함은 이제까지 해 왔던 것처럼 그가 들은 말씀을 그대로 지켰다.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두 종과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 싣고 하나님이 일러주신 곳으로 향했다.

사흘 째 되는 날,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려라. 나는 아이를 데리고 가서 예배드리고 돌아오겠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하고 불과 칼을 손에 들고 앞장서 산에 올랐다. 이삭은 번제 나무를 지고 그 뒤를 따랐다.

이삭이 말했다. “아버지, 불도 있고 나무도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요?”

아브라함이 대답했다.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아들 이삭을 결박해 그 위에 놓은 뒤, 칼로 이삭을 잡으려 했다.

바로 그때, 야훼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아브라함을 급하게 불렀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예, 여기 있나이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않았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

아브라함은 뒷편에 뿔이 수풀에 걸려있는 수양을 가져다가 이삭대신 번제로 드렸고, 그 땅이름을 ‘야훼께서 준비하신다’는 뜻으로 ‘야훼 이레’라고 하였다. 이 일로 아브라함은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번성하고, 그 씨로 말미암아 인류가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축복을 받게 되었다.

순종하는 아브라함

놀라운 것은 아브라함이 아무런 의심없이, 그리고 망설임 없이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했다는 것이다. 이런 어마어마한 소리를 들었다면 이것이 과연 진정 하나님의 음성일까 의심해 볼 만도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러지 않았다. 전에 어떤 목사님 한 분께선 ‘우리가 이런 음성을 듣는 다면 깜짝 놀라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소리치지 않았을까’라고 말씀하신 것을 들은 적 있는데, 그 말에 공감했다. 기도하다 이런 말을 듣게 되면 누군들 놀라고 의심하지 않을까. ‘하나님이 주고 인정하신 유일한 자식인데, 이 아이를 통해 민족이 별과 같이 많아지겠다고 약속하신 바가 있는데 이 아이를 번제로 드리라니. 하나님의 약속에 어긋나는 이런 요구를 하는 존재가 과연 하나님이 맞나. 의심해 보련만, 아브라함은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는 음성만 듣고도 하나님임을 확신할 수 있도록 평소 관계가 밀접했다는 것이 아닐까.

이삭의 놀라운 순종

그런데, 아브라함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바로 이삭이었다. 이삭은 당시 아버지의 힘을 당할 수 없는 어린 아이가 아닌 청년이었다(17세~37세 미만이라고들 한다. 이유는 번제 사건 다음 나오는 것이 127세에 죽은 사라 이야기인데, 사라가 이삭을 낳은 것이 90세 때 였으므로 이삭은 37세가 된다. 따라서 번제 당시 이삭은 37살이 채 되지 않은 나이였다고 한다.). 확실하지는 않아도 2,30대의 청년이 120~137세의 노인을 힘으로 당하지 못해 가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사건은 아브라함과 이삭 두 부자의 대를 이은 순종으로 아름답게 매듭지어진 기적 같은 이야기이다.

“순종은 제사보다 낫다1사무엘상 15:22~23[/note/]“고 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나 아들 야곱과는 달리 평생을 큰 기복 없이 축복 속에 살다 하나님 품으로 돌아갔다. 이삭이 누린 축복은 젊은 시절 그가 가진 큰 믿음과 놀라운 순종을 보여드림으로 말미암은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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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no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