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을 품고 업어주시는

2015년 5월 5일

배에서 태어남으로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 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이사야 46:3~4 

우리는 열달을 뱃속에서 품긴채 지내다 또 밖으로 나와 안고 업는 부모의 품에서 자라난다. 다 자라 독립해 가정을 꾸리게 되면 그 품에서 벗어난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부모는 자나깨나 늘 자식 생각이다. 학교에 들어가면 들어간 대로, 직장에 가면 직장에 간대로 거기서 다치지 않고 실력을 발휘하는 자가 되길 바라고, 시집가고 장가가면 또 금슬 좋게 서로 사랑하며 잘 살기를 바란다. 손주가 태어나도, 그 손주가 장성하고 내 자식이 늙어가는 나이가 되면 또 어디 아프지는 않을까, 노후는 어떻게 보내려나 또 새로운 걱정이 시작된다.  자식으로, 부모로 살다보니 이제 눈이 좀 뜨이기 시작한다. 

 

부모님의 입장이 어렴풋이 나마 이해되니 하나님의 마음 또한 미루어 짐작이 된다. 부모 입장에서 우리는 ‘생겨난’ 존재들이다. 그런데도 부모 자식으로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평생을 노심초사하며 최선을 다해 보살핀다. 당신 입에는 거친 것을 넣더라도 자식 입에는 좋은 것을 넣어주려 애쓴다. 하물며 직접 계획해서 지은 우리를 대하는 그분의 마음은 어떨지. 

 

언뜻 생각하면 부모-자식이 관계 당사자고 하나님은 제 3자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부모가 자녀를 제 소유가 아닌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해야 할 근거가 여기에 있다. 자녀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내게 맡겨진 존재다. 어떤 계획을 가지고 사랑과 정성을 담아 하나하나 빚어낸 창조물이다. 한낯 인간 예술가의 작품도 존중받을 진대, 하나님의 이 놀라운 작품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이렇게 생각하면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이나 주위에 보잘것 없게 취급받는 사람 모두 그 존재감이 다르게 느껴진다. 인간이 존엄성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그러기에 태어나 죽기까지 하나님은 품에 안고 등에 업어 우리를 돌보시고 지키고 구하신다. 

 

 

오월. 누구나 가족을 다시 한번 생각하는 달이다. 가족은 태어남으로 만나 죽음으로 헤어지는 관계다. 그동안 우리는 울고 웃으며 서로 사랑하고 걱정하며 함께 지낸다. 사랑하기에 더 해주고 싶고, 그러지 못할 때 안타까워 한다. 자녀가 내 품을 떠나 있는 동안 내 눈과 손에 미치지 못하기에 노심초사 한다. 내 일생을 뒤돌아 본다. 구비구비 곡절도 많고 래프팅 코스 같았던 길을 하나님 도움 아니면 어떻게 헤쳐 나와 여기까지 왔을까. 그걸 보면 앞으로의 내 일생 뿐 아니라 내 자녀의 앞날과 안위도 걱정할 필요가 없구나 하게 된다. 납득이 된다. 오늘부로 내게 ‘걱정’은 그저 ‘기도하라는 알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