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길 걷기

2016년 1월 5일
걷는 것을 좋아하는 내게 정동길은 큰 축복이다. 
큰길에서 벗어나 작고 조용한, 오래된 길을 걷는 것은 큰 기쁨이다. 특히나 평일 오전, 촉촉하게 비까지 내리는 아침 정동길은 정갈한 고즈넉함이 그 풍취를 돋운다. 
보통 좁은 뒷길은 대개 차와 사람이 한데 뒤섞여 걸어야 하기 때문에 신경 쓸게 많지만, 정동길은 인도와 차도가 구분되어 안전하다. 찻길이 따로 마련되어 있으면 자동차도 속력을 낼만하고 몰릴 만도 하지만 통행량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래서 더 조용하고 배기가스가 덜하니 공기도 깨끗하다. 오래된 길이기에 좌우에  볼거리도 많다. 길 자체가 역사고 박물관이다. 

하지만, 구한말-일제시대로 이어지는 역사가 정동길과 함께하기에 걷는 동안 때로 마음이 아플 때가 많다. 그 첫째가 바로 덕수궁 중명전이다. 왕실 도서관으로 지어졌던 이 붉은 벽돌 건물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굴욕의 장소가 되었다. 


그다음은 을미사변 후 아관파천이 이루어졌던 러시아공사관이다. 한 나라의 궁에 자객이 난입해 황후를 해친 것 만도 기막힌 일인데, 하물며 황제는 외국 공사관으로 피신을 해야 했다니 백척간두에 놓였던 나라의 운명을 읽을 수 있는 것만 같아 괴롭다. 

사진에 보이는 건물은 정동교회다. 
이광수의 작품 ‘흙’에서 여주인공 정선이 겨울밤 괴로워하던 바로  그곳이고, 이문세가 광화문 연가에서 노래했던 곳이다. 이날은 벗은 나무며 비 내리는 회색 하늘이 그 운치를 더해줬다. 

천천히 걸어 시립미술관으로 향했다. 이 시립미술관 역시 ‘경성재판소’로 지어져 사용되던 아픈 시절이 있는 건물이다. 하지만 월요일은 휴관.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 교보문고로 향했다.  큰길로 벗어나기 전에 나타나는 것은 구세군 중앙회관과 구세군 서울제일교회.

정동에 남아있는 근대 건축물들이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제시대의 편린을 가지고 있지만, 이 구세군 중앙회관은 오로지 민족과 복음을 위한 구세군 훈련기지로 쓰이며 꿋꿋이 버틴 곳이라 기분 좋은 경탄을 자아내게 된다. 언뜻 보기에 석조전처럼 세모난 박공 아래 기둥이 줄지어있지만 그 느낌이 비슷하면서도 다른 것은 대리석이나 화강암이 아니라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 이어서다. 그래서일까. 내 눈에는 규모는 더 작은데도 더 엄숙해 보이고 더 사람을 누르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종묘와 다른 궁궐의 전각이 다른 그런 차이랄까. 


서울은 그 역사가 무척 길다. 풍납토성만 해도 2천 년이 넘는다. 하지만 잦은 전란과 일제, 재개발로 옛날 건물들은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 그나마 정동에 근대적 건물이 많이 남아있고 아픈 세월을 함께 했기에 걸으면서 그때의 풍취를 즐기면서도 동시에 속상해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덕수궁 자체만 해도 가슴 아프다. 덕수궁의 본래 궁역(클릭하면 그림으로 볼 수 있어요) 은 우리가 보고 있는 담으로 둘러진 것보다 훨씬 훨씬 넓었다. 예원학교, 경기여고, 조선일보사 일대가 모두 덕수궁 궁역이었다. 이런저런 외부사정으로 정문까지 바뀌고 1904년 대화재로 많은 전각이 불탔다.  덕수궁 돌담길은 덕수궁을 반으로 나누기 위해 일제가 억지로 쌓아 1/3로 줄여놓은 흔적이다. 고종 승하 뒤 제 이름인 경운궁으로 돌아가지 못한 것도 그 일환이다. 우리나라를 둘러싼 요즘 국제 사정을 보면 마치 풍전등화의 그때로 돌아간 듯 해 답답해질 때가 많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알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주는 것도 불행한 일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는 중요한 첫 발걸음이라고 생각한다. 글을 쓰기 위해 웹 서핑을 하던던 중 교보생명에서 ‘역사탐방 길라잡이’라는 좋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덕수궁 답사 전에 한 번 보고, 제공하는 미션을 실제 덕수궁에 가서 수행해보면 그저 다녀오는 것 보다 훨씬 재미있을 것으로 보였다. 
아는 만큼 보이고, 그때 보이는 것은 또 전과 다르다. 그래서 정동 길은(다른 곳도 마찬가지겠으나) 갈  때마다 다른 것이 보인다. 다음에 갈 때는 의문의 화재와 덕수궁이 이렇게 줄어버린 배경에 대한 기사를 읽고 갈 참이다. 그때는 또 어떤 것들이 새로 보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