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나리아

2017년 2월 5일

플라나리아


토요일, 온 가족이 모처럼 시간이 났다. 산으로 오가는 길에서 봤던 찜질방에 갔다. 뜨거운 사우나나 목욕은 좋아하지 않지만, 따뜻한 바닥에서 뒹굴거리는 것은 매력적이다. 어렸을 때 아랫목에 이불 하나 펼쳐놓고 형제들이 함께 놀던 기억 때문일까.

오래전, 숲속에 있는 점이 마음에 들어 딱 한 번 가봤던 찜질방. 다시 가보니 목욕 시설은 오래되고 낡아 샤워만 하고 나왔지만, 넓은 마루에 온 가족이 모여 아무것도 않하고 먹고 노는 것은 참 기분 좋은 일이었다.

찜질방에는 숯가마, 옥돌 방, 아이스 방…. 종류도 많다. 식구들이 찜질방 구경을 간 사이 학교 도서관에서 전자책을 빌려읽었다. 그 책이 바로 지금 소개하는 ‘플라나리아’다.

제목이 특이해서 골랐다. 도서관 책은 결제할 필요가 없으니 전자책이라도 부담없이 골라읽을 수 있다. 재미 없으면 그자리에서 반납하면 되니까. 그런데 별 기대 없이 읽기 시작한 책이 의외로 재미있었다. 처음 몇 편은 장편으로 쭉 이어질 것 같은 이야기가 뚝 잘린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마지막 이야기는 읽는 내내 그 내용이 머릿속에서 동영상으로 살아 움직였다. 영화로 만들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야마모토 후미오의 단편소설집이다. 플라나리아, 네이키드, 어딘가가 아닌 여기, 죄수의 딜레마, 사랑 있는 내일 등 다섯 이야기가 담겨있다.

플라나리아

유방암으로 절제수술과 복원수술을 받은 주인공은 스스로 생각해도 꼬인 성격. 사회부적응에 노인 알러지로 직장도 그만두고 부모 밑에서 지낸다. 하지만 부모와도 애인과도 잘 지내지 못하고 다시 태어난다면 플라나리아로 태어나길 꿈꾼다.

네이키드

MD였던 주인공은 결혼하면서 남편과 함께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혼으로 자동 해직된 상태. 2년간 그럭저럭 지내지만 매사에 의욕도 없고 핸드메이드 공예만 이것저것 배워가며 무직 상태로 지낸다. 그래도 옆엔 오래된 친구와 새로 사귀기 시작한 애인이 있다. 새 일자리도 의뢰받은 상태 하지만 뭐든 잘 안될까 두렵기만 하다. 단순하게 살 수는 없는걸까.

어딘가가 아닌 여기

정리해고는 아니지만 계열사로 좌천당한 남편. 자식들도 품을 떠나려는 것 같고 속을 썩인다. 수입을 메꾸기 위해 밤 열 시부터 새벽 2시까지 마트 계산대를 지킨다. 일흔 번째 생일기념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교통사고를 만나 혼자가 된 엄마도 돌봐드려야 한다. 치매로 입원한 시아버지도 형제끼리 돌아가며 돌봐드려야 하는 고단한 주인공. 아침이면 다섯시 반에 일어나 도시락 세 개를 싸야 하지만 힘들다 생각하지는 않는다.

코앞에 닥친 일들을 헤쳐 나가기도 벅차서 여태껏 그런 건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죄수의 딜레마

스물여섯 번째 생일날 청혼한 연인은 심리학 박사과정. 주인공은 오랜 연애기간중 회사 동료와 바람도 피우고 소개팅도 한다. 엄격한 아버지의 과도한 통제가 숨 막혀 집을 나오고 싶어 하지만 집을 나오는 길은 오직 결혼뿐. 하지만 결혼은 망설여진다. 현재 사귀고 있는 애인은 잠자리를 별로 원하지 않아 마음에 들었으면서 바람피우는 상대와는 호텔도 드나드는 모순투성이 주인공.

죄수의 딜레마는 심문 중인 두 피의자를 각각 다른 방에 두고 먼저 진술하는 쪽은 벗어날 수 있지만 다른 쪽이 먼저 진술할 경우에는 가중처벌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빠지는 딜레마를 말한다. 물론 둘 다 발설하지 않으면 아무 문제 없지만, 서로 상대가 먼저 말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과 배신할 수 없다는 의식이 끝없는 번뇌를 가져오는 것이다. 서로 강한 역할을 맡으라고 떠미는 딜레마에 빠진 두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연인의 집으로 가지만, 느닷없이 남자친구의 어머니와 마주치게 된다.

사랑이 있는 내일

메뉴도 단출하고 술도 한 가지. 누구나 문 열고 서슴없이 들어올 수 있는 오래된 선술집. 이 가게 주인이 주인공이다. 어쩐지 심야식당이 생각난다.

여기에 개성 강하고 흥미로운 여자가 하나 등장한다. 미인은 아니지만,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얼굴에 친화력도 대단하다 사고방식도 행동도 자유분방. 손금을 봐주고 대신 술과 안주를 대접받는다. 문제는 이 사람이 공원 놀이터에서 노숙하는 사람이라는 것. 노숙을 말리러 갔다가 자기도 모르게 동거를 제안한다. 어디 매여 고정적으로 일하는 것은 싫어하지만, 마음 내킬때면 가게일도 돕는다. 선술집 주인은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라도 하라고 하지만 거절당하고 청혼도 해보지만 그 역시 거절당한다.

당신 멋대로 나를 불쌍하게 보지 말아 줄래? 일을 하든 결혼을 하든, 둘 중 하나가 아니면 화를 내다니, 우리 아버지하고 똑같아.

대기업 건설회사 영업부에 있던 주인공. 어머니가 경영하는 미용실 셔터맨으로 무위도식하던 아버지처럼 되지 않겠다고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지만, 결과는 외로운 아내의 이혼신청이었다. 행복한 가정을 만들려던 노력이 오히려 가정을 깨트리게 되자 직장을 그만두고 선술집을 차렸다. 귀여웠던 다섯 살 딸은 어느새 자라 열두 살 어린 아가씨가 되어 아빠를 찾아오고, 아빠의 새로운 사랑을 응원한다.

이 다섯 가지 이야기에는 공통으로 한 가지 질문이 깔려있다.

‘과연 직장이 행복을 보장해주는가?’ 하는 문제다.

첫 번째 이야기 플라나리아에서 주인공은 직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지 않다. 오히려 꼬인 성격으로(타고난 성격에 뚱보로 이지메당했던 경력, 유방암으로 애인이 도망간 경험이 더욱 꼬이게 하였다) 주위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두 번째 이야기 네이키드에서는 이직과 백수 문제가 동시에 나온다. 첫 이직은 희망에 찼었는데, 두 번째 이직은 두렵기만 하다. 이제 고치에서 나와 뭔가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것은 알지만 새로운 시작은 어렵다.

세 번째 이야기 어딘가가 아닌 여기는 정리해고, 좌천, 시간제 아르바이트 이야기를 다룬다. 좌천이나 다름없는 인사로 몰린 남편도, 재정적 문제로 시간제 심야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주인공도 불행하지 않다. 부부 사이도 단단하다. 혼자된 엄마와 치매로 입원한 시아버지, 문제를 일으키는 남매도 있지만, 행복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직장 내 성희롱에도 의연히 대처한다.

네 번째 이야기 죄수의 딜레마에서는 아직 자리 잡지 못한 대학원생과 직장인의 연애, 결혼문제가 등장한다.

다섯 번째 사랑이 있는 내일에서는 대기업이란 직장도 가정의 행복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내일을 알 수 없는 노숙자라도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다섯 가지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은 직장이 있어서 행복한 것도 아니고, 없다고 꼭 불행한 것도 아니다. 사람들의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마음먹기다. 직장은 행복의 필요조건은 될 수 있어도 충분조건은 될 수 없다는 말이 생각난다. 내가 가진 것으로 행복해지려고 한다면 사람은 영원히 행복해질 수 없다. 사람은 손에 쥔 것에는 늘 시들함을 느끼고 모자란 것, 필요한 것은 늘 새롭게 찾아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직장’을 이야기 했지만, 나는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직장은 없더라도 직업은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일이 없이는 행복할 수 없다. 보람을 느낄때 사람은 행복하다. 수입이 얼마가 되든, 내 돈을 쓰든 보람을 느낄 일이 필요하다.  

* 별 관계 없는 이야기

  • 어쩌다보니 책은 가볍게 읽었는데 독후감은 생각보다 길어져 버렸다.
  • 일본 문학작품을 읽을 때 가장 어려운 것은 바로 人名. 사람 이름이 도무지 머릿속에 안 들어와요.
  • 리디북스나 iBook으로 읽을 때는 형광펜, 밑줄긋기, 메모기능이 되어 좋았는데 대출받은 교보 전자책에서는 할 수 없어 조금 불편했다. (마음에 드는 구절을 제대로 인용하지 못해 아쉽다.)

* 관련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