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Archives - 열매맺는나무
정동길 걷기
잡문집 / 2016년 1월 5일

걷는 것을 좋아하는 내게 정동길은 큰 축복이다.  큰길에서 벗어나 작고 조용한, 오래된 길을 걷는 것은 큰 기쁨이다. 특히나 평일 오전, 촉촉하게 비까지 내리는 아침 정동길은 정갈한 고즈넉함이 그 풍취를 돋운다.  보통 좁은 뒷길은 대개 차와 사람이 한데 뒤섞여 걸어야 하기 때문에 신경 쓸게 많지만, 정동길은 인도와 차도가 구분되어 안전하다. 찻길이 따로 마련되어 있으면 자동차도 속력을 낼만하고 몰릴 만도 하지만 통행량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래서 더 조용하고 배기가스가 덜하니 공기도 깨끗하다. 오래된 길이기에 좌우에  볼거리도 많다. 길 자체가 역사고 박물관이다.  하지만, 구한말-일제시대로 이어지는 역사가 정동길과 함께하기에 걷는 동안 때로 마음이 아플 때가 많다. 그 첫째가 바로 덕수궁 중명전이다. 왕실 도서관으로 지어졌던 이 붉은 벽돌 건물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굴욕의 장소가 되었다.  그다음은 을미사변 후 아관파천이 이루어졌던 러시아공사관이다. 한 나라의 궁에 자객이 난입해 황후를 해친 것 만도 기막힌 일인데, 하물며 황제는 외국 공사관으로 피신을 해야 했다니 백척간두에 놓였던 나라의 운명을 읽을 수 있는 것만 같아 괴롭다.  사진에 보이는 건물은 정동교회다.  이광수의 작품 ‘흙’에서 여주인공 정선이 겨울밤 괴로워하던 바로  그곳이고, 이문세가 광화문 연가에서 노래했던 곳이다. 이날은 벗은 나무며 비 내리는 회색 하늘이 그 운치를 더해줬다.  천천히 걸어 시립미술관으로 향했다. 이 시립미술관 역시 ‘경성재판소’로 지어져 사용되던 아픈 시절이 있는 건물이다. 하지만 월요일은 휴관.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 교보문고로 향했다.  큰길로 벗어나기 전에 나타나는 것은 구세군…

아침 2
잡문집 / 2015년 12월 21일

이 땅에 사는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아침시간은 늘 바쁘다. 출근 전 5분이 그 이후 30분에 맞먹을 때도 있다. 엄마, 아내라는 서포터로서 다른 식구들의 아침을 좀 더 느긋하게 만들려는 탓에, 내 아침은 더 바쁘고 더 일찌감치 시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런 까닭에 포기할 수 없고 놓칠 수 없는 시간이 바로 아침시간이다.  이른 아침은 고요하다.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정숙함. 이런 차분함은 집중과 몰입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 시간은 하루 중 유일하게 온전한 나만의 시간이다. 하지만 갓 깨어난 정신은 멍한 상태다. 이 상태를 재빨리 정비하기 위해 일종의 리추얼 ritual을 갖는다. 일어나 화장실에 다녀오고 세수를 한다. 식사 준비상태를 체크하고 책상에 앉는다. 잠깐 묵상을 한 뒤 성경을 필사한다. 공책을 반으로 접어 왼쪽엔 한글로 쓰고, 오른쪽은 영어 성경을 베낀다. 원래는 읽기만 했는데 그저 눈으로 좇는 느낌이고 생각이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것만 같아 천천히 읽기 위해 필사라는 방법을 택했다.    잠깐의 묵상과 성경필사를 마치면 찻물을 끓인다. 차나 커피를 들고 다시 책상에 앉아 이번엔 노트북을 연다. 그리고 글을 쓴다. 되든 안되든 글을 쓴다. 어떤 글인가는  상관없다. 무조건 최소 15분 이상은 쓴다. 처음엔 습관을 들이기 위해 별 생각이 없을 땐 그저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을 의미 없는 상태 그대로  적어내려 갔다.    이른 아침에 글을 쓰는 이유는 나 혼자 있을 시간이  그때밖에 없기 때문이다. 집중할 시간이 그때 밖에 없기…

아침 1
잡문집 / 2015년 12월 15일

아이를 키우는 것은 내 잠을 나눠주는 거나 다름없다. 갓난쟁이였을 때, 큰 애는 두 시간마다 깨서 젖을 먹었다. 그 사이사이엔 오줌을 싸고 똥을 쌌다. 싸고 나면 또 배가 고프고, 배가 차면 또 싸고… 그런 틈틈이 애도 자고 나도 잤다. 아니다. 그 녀석은 잤는지 모르지만 난 졸았다. 맞다. 졸았다. 기저귀 갈다 말고 기저귀 커버를 손에 쥔 채 졸아본 적도 있다. 그만큼 잠이 모자랐다.   아이가 조금 자라 네 살 정도 되자 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이 늘었다. 그땐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어머님과 함께 살 때였는데, 어머니는 종종 예언자처럼 “그래. 잘 수 있을 때 실컷 자둬라. 애 크면 그것도 맘대로 못 잔다.”고 하시곤 했다. 그때는 미처 몰랐다. 이렇게 오래 일찍 일어나야 하리라고는.   유치원을 가고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일어나는 시간은 점점 빨라졌다. 중학교는 일곱 시 반까지 등교해야 했다. 고등학생 언니들 학습에 방해되지 않기 위해 같은 시간에 도착해야 한단다. 여섯 시 반에는 밥을 먹고 출발해야 하니, 나는 다섯 시 반에 일어나야 아침을 차리고 점심 도시락을 준비할 수 있었다. 큰 애가 졸업하니 작은 애도 고등학생이 되었다. 또 그렇게 아침잠을 깎아 아이들을 주었다.   학교를 졸업하면 나도 깜깜할 때 일어나는 것에서 졸업할 줄 알았다. 아니었다. 겨울방학이 되지도 않아 취업한 아이들은 백수생활도 없이 출근을 시작했다. 일곱 시면 집을 나서야 하는 아이들. 큰 애는 이번 달부터 영어학원에 들렀다 출근하기 시작했다….

행복하게 사는 법
잡문집 / 2015년 6월 17일

​잠을 불편하게 잤는지 일어나니 온 몸이 아프다. 그것 말고도 뭔가 찝찝하다. 어제 뭔가 불쾌했던 기억이 있었는데… 하다가 드디어 생각났다. ​맛 없었던 저녁밥이었다.  모처럼 딸과 갖는 오붓한 시간. 맛있는 것을 시켜 먹으면서 영화를 볼 생각에 들떠버렸다. 드류 베리모어가 나오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 Everafter를 보기로 했는데, 1998년 개봉 당시 신데렐라 이야기의 새로운 해석으로 평이 괜찮았던 것이 기억났다. 모녀가 함께 보기에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선정은 좋았지만, 저녁밥 먹는 것은 난항을 거듭했다. 맛있게 하는 중국집이 그날따라 노는 날이었고, 겨우 찾아들어간 밥집은 어째 손님이 많이 줄었다 했더니 맛이 예전같지 않았다. 영화보는 기분을 내려고 편의점에 들러 팝콘까지 사갔지만, 시간이 늦어 앞부분 밖에 못보고 말았다.  맛있는 탕수육(도원 탕수육이 동네 중국집 몇 군데 중 가장 맛있다!)도 못먹고, 맛없는 저녁밥에 헛돈만 쓰고 다닌 데다, 영화도 제대로 못보니 계획되로 된 것이 하나도 없단 생각에 속이 상했다. 무엇보다 딸과 오손도손 재미있었을 시간을 망친 것 같아 안타까웠다. 그러다 보니 자기 전에도 자고 나서도 계속 그 생각만 났다. 그러다 생각난 것이 바로 이 말이었다. 그랬다. 어제 저녁 있었던 일들 중에 난 가장 기분 나빴던 일 두 가지만 계속 머리속에 리플레이 시키고 있었다. 그동안 난 불행한 사람일 수 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면 그 두가지만 빼면 모두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 딸과 음식점을 찾아 손 잡고 걸어다니면서 함께 웃고 이야기도 나눴다. 딸에게 어울리는 예쁜 샌들도 발견했고 화장품도 샀다. 영화는…

꿈꾸는 작업실
잡문집 / 2015년 6월 4일

남편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다. “전에는?” “전에는 했지.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쓸데 없는 데에 솔직한 남편. 여자는 남편이 늘 진실되길 원하지만 이런 일엔 차라리 입에 발린 말이라도 해주길 바란다. 남편도 그쪽이 함께 살아가는데 더 편하다는 걸 알텐데, 어째서 굳이 ‘지금은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던 것일까.  지금 아마 세시쯤 되었을까. 자다 말고 생각해도 분하다. 주먹을 쥐고 작게 부르짖는다. “당신 정말 너무했어!” 옆에 남편은 자고 있었을까, 아님 깨어있었을까, “뭐라고 그러는거야?” ‘나 자고 있었어?’ 꿈을 꾸고 있었나 보다. 그런가 보다.  “응? 아니야. 꿈 꿨나봐.” 픽, 웃음이 난다. ‘아이고. 잠꼬대를 했나보네.’ 남편은 나때문에 잠이 깬건지 아직 잠들지 못하고 있다.  “토스트 해 줄까?” “그러든지.” 살짝 귀찮은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내가 잠을 깨워버린 셈이니 살짝 드는 미안한 마음에 일어나 부엌으로 나간다. 아이들이 깰까봐 불도 켜지 않고 어두운 부엌에서 더듬더듬 빵 봉지를 찾고 토스터를 찾아 빵을 넣고 스위치를 누른다. 촉촉하고 야들야들한 식빵. 빵이 너무 부드러운지 아님 좀 커서 그런지 어둠 속에서 휘청이는 빵을 가둥그려 제대로 한다. 응? 그런데 살짝 곰팡이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불빛이라고는 파자마 가슴께 달린 주머니에 넣어둔 스마트폰 빛 밖에 없는데. 이거 불을 켜야 하나 망설여진다. ‘어차피 먹으려면 불을 켜야 하는데 지금 불을 킬까?’ 그런데, 우리 집 구조가 이상하다. 이건 전에 살던 집 구조 같은데. 그러고 보니 난 이런 파자마가 없다. 이상한데… 눈을 깜빡인다. 다시 눈을…

커피
잡문집 / 2015년 1월 13일

​ ​커피 콩가 오늘 아침 새로 사온 커피는 콩가. 커피에 대해 잘 모르는지라 누가 사오면 사오는 대로 마시고 주면 주는대로 마신다. 지난번에 마시던 케냐AA라는 커피는 향기를 마신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향이 좋았는데, 이번 콩가는 첫 맛은 구스름하니 숭늉같다가 끝에 남는 맛은 어쩐지 달다. 내가 커피를 마시며 느끼는 것은 향이 좋다, 구수하다, 쓰다, 시큼하다 등등의 맛 뿐이었는데, 이번에 ‘달다’라는 맛이 추가되었다. 과일맛이랄까?    커피 볶는 집 동네에 커피 볶는 집이 생긴 것은 작년이다. 여름부터 문을 열어 시음회도 했다는데, 내가 알게 된 것은 늦가을. 하루 두 차례 문을 여는데, 내가 작업실에 나가기 전에 문을 열었다 닫고 다시 내가 집에 들어간 다음에 나왔다 들어간다고 했다. 숨바꼭질하듯 가게를 여니 몰랐던 것이 어찌 보면 당연. 오늘 새로 산 커피는 바로 이 집에 얼른 달려가 사왔는데, 그것은 이 집이 문 여는 시간이 들쭉날쭉해 그 시간을 맞추기가 어렵기 때문. 주택가에 있다 보니 커피 볶는 냄새로 민원이 들어와 한참을 아침에 열지 않았단다. 가게 하기도 힘들구나.      집에서 커피 만들기 남편이 좋아하는 방식은 핸드 드립이다. 차 마시는 사람이 다도를 즐기듯 물을 끓여 굵게 갈은 원두에 붓고 손수 내린다.  그에 비해 난 좀 편한 것을 좋아한다. 커피 메이커로 내리든지 아니면 모카 포트에 넣고 작은 불로 부르르 끓여 마신다. 모카 포트는 대학 다닐 때 학교 앞 커피 전문점의 사이폰 커피를 생각나게…

콩국
잡문집 / 2014년 8월 19일

콩국 … 새벽의 노량진 시장, 아이들이 좋아하는 기어다니는 꽃게    해질녘 여름 시장 좌판 위의 우뭇가사리 넣은 콩국  인사동 툇마루 막걸리와 골뱅이, 아내와 함께한 대작…   구본형의 ‘익숙한 것과의 결별’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삶에 있어 행복이란 무엇이고 여유란 무엇인가에 관한 구절이다.     난 이제껏 밖에서 콩국을 사 먹어본 적이 없다. 콩국은 늘 집에서 만들어 먹는 여름음식이었다. 시원하게 콩국을 먹던 어느 여름 날 ‘콩국은 집에서 먹어야지 절대 밖에서 사 먹고 다니면 안된다’고 엄히 이르신 할머니 말씀 때문이다. 냉장시설이 시원치 않던 옛날 상하기 쉬운 음식인 콩국은 배탈과 직결되었으니 당연한 말씀이었다. 하지만 어릴 적 그 말씀은 ‘콩국 매식=배탈’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공식이자 율법 같은 말로 각인되었다. 그래서 고소하고 시원한 콩국은 몇 푼 돈을 주고 먹을 수 있는 그런 음식이 아니라, 늘 콩을 불려 삶아 갈아 걸러야 얻을 수 있는 귀한 별미가 되었다.    콩국과 비슷하게 내게 금기시된 음식이 있었다. 돼지갈비다. 한창 돼지 디스토마 감염으로 시끄러웠던 시절, 아버지는 ‘밖에서 돼지갈비 같은 것은 사 먹지 말아라’고 말씀하셨다. 원래 아버지는 고기를 그리 즐기지 않으셨고, 나도 돼지고기는 언젠가 잡내로 괴로웠던 적이 있던 지라 그 말씀은 대학교 4학년 때 까지 지켜졌다. 하지만 대학 친구들과 돼지갈비를 숯불에 한번 구워 먹어본 뒤로는 한동안 가장 즐겨 먹는 음식이 되어버렸다.    둘 다 집안의 가장 큰 어른들로부터 나온 말씀이었는데 콩국은…

장마비
잡문집 / 2014년 7월 23일

장마비   비가 내린다. 장맛비다. 이제야 겨우 장마가 시작 되었다. 어젯밤부터. 길고 긴 여름 동안 너무나 가물었다. 땅은 갈라지고 먼지만 날렸다. 담쟁이 덩굴마저 누렇게 죽어버린 목 마른 여름이었다. 어찌나 건조했는지 … 뉴스에서 보는 저수지나 댐들은 거의 바닥을 드러낼 지경이었다. 비가 온다. 생명을 담은 비.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동안은 정말 매일 샤워하는 것도 송구했다. 시골에서는 제한 급수로 화장실 변기나 세탁, 설거지, 세수에 쓰일 물도 귀한데, 나는 서울 산다는 이유로 아침 저녁 샤워를 하다니. 폭염주의보까지 내렸던 까닭에 먼지와 땀으로 뒤범벅 되어 버려 물이라도 끼얹지 않고서는 하루를 시작할 수도, 잠이 들 수도 없는 나날이었다. 물이 출렁여야 할 논이 물기 하나 없이 거북이 등처럼 되어 버린 뉴스 화면은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고 있다. 작년만 하더라도 비가 하도 오래 내려 이제 우리나라 기후를 건기와 우기로 나눠야 하는 건 아닐까 했었는데, 올해는 7월 하순이 되어서야 장마가 시작되다니. 다른 때라면 장마도 거의 끝물이 아닌가 말이다.  그래도 힘찬 빗소리와 덜컹덜컹 창문을 흔드는 바람 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음이 놓인다. 안정이 된다.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 오기 전에는 2층에 있는 내 방이 옆집 옥상과 마주하고 있어 이렇게 비가 오면 빗소리가 정말 대단했다. 옥상 바닥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자다가도 내 귀에 꽂히곤 했다. 창밖을 보면 굵직한 토란대와 거기 달린 커다란 잎들이 흔들흔들 출렁이는 모습은 보기 좋았다. 우산으로도 씀직한 토란 잎들은…

물 한 그릇의 인심
잡문집 / 2014년 7월 2일

@Neogeolegend/wikipidia image   물 한 그릇의 인심 몇 달 전 인천공항에서였다. 비행기에서 내려 집에 가기 전, 부모님을 모시고 P모 제과점에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마셨다. 약을 잡수셔야 하는데 아뿔사, 사정을 모르고 이 딸은 다 마신 일회용 컵을 잽싸게 버린 뒤였다. 걱정 마시라, 물을 받아 오겠다며 카운터로 가서 직원에게 물을 청했지만 답은 ‘아니오’였다. 물은 따로 제공하지 않으니 화장실 옆에 있는 음수대를 이용하란다. 외부에 있는 제과점이나 커피 전문점(물론 전국의 모든 가게를 다 이용해본 것도 아니고, 즐겨 가는 곳도 한정되어 있긴 하지만)에서 물을 제공하지 않는 것은 못봤다. 심지어 따뜻한 물이나 얼음물을 준비해 놓고 고객이 요구하는 대로 제공하기도 한다. 헌데 우리나라 관문이라 할 수 있는 공항에서 이런 경험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얼마 전까지 물을 돈 주고 사 먹는 다는 생각은 해 본적이 없다. 물은 언제 어디서나 청하기만 하면 댓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마실 수 있는 것이었다. 학교 다닐 때 세계지리 시간에 “유럽에서는 석회 때문에 수질이 좋지 않아 마실 물을 병에 담아 팔고, 사람들은 그것을 비싼 돈을 주고 사 마신다. “는 말을 듣고 놀랐었다. “옛날에는 우리 집 우물이 약수나 마찬가지여서 배 아픈 사람들이 와서 청해 마시곤 했었다.” 는 어른들의 말씀을 듣고 자랐다. 수도물을 마시게 되면서 차츰 우물물은 마시게 되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지하수 오염으로 허드렛 물로만 쓰게 되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아주 어릴 적에도 이미 서울…

동선동158번지/놋쇠문고리
잡문집 / 2014년 1월 25일

옛날 집은 정말 추웠다. 아랫목은 잘잘 끓어도 윗목은 냉골이었다. 윗풍이 센 집이라 정말 추운 날이면 새로 빨아 꼭 짜 놓은 물걸레가 서걱서걱 얼어붙을 정도였다. 미닫이 문을 닫고 두꺼운 덧문을 또 닫아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우리가 자는 아랫목은 두꺼운 요 밑으로 발을 집어 넣으면 앗 뜨거 할 정도로 뜨거웠고 이불 속은 포근했다. 21세기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면 유리창에 꽃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밖은 춥고 안은 따뜻하고 유리창 안에 맺힌 습기가 밤새 얼어붙어 밖이 제대로 보이지 않도록 여러가지 무늬를 그렸다. 나중에 학교에서 역사시간에 ‘당초무늬’라는 것을 보고 이때 창문에서 보았던 얼음 무늬가 떠오를 정도로 정교했다. 자연이 창문에 조각해 놓은 얼음은 가장자리는 두껍고 안쪽으로 갈 수록 무늬는 얇아졌다. 내 동생과 나는 심심하면 창틀에 매달려 손톱으로 얇은 얼음들을 긁어냈다. 손톱 사이로 차가운 얼음부스러기들이 들어왔다 도르르 말려 나무 창틀로 떨어져 내렸다.  그 장난에 지친 어느 날은 얼어붙은 창문에 혀 끝을 대 봤다. 살짝 붙었다 떨어지는 느낌이 새로웠다. 마치 떨어지지 않을 듯 붙었다 얼음이 녹으면서 떨어지는 혀.    그 짜릿함에 맛 들여 새롭게 찾은 도전 과제는 놋쇠 문고리였다. 어느 날 뒷뜰을 지나다 발견한 노란 문 손잡이에도 하얗게 서리가 얼어붙어있었다. 가슴이 다 두근거렸다. 살짝 붙었다 떨어지는 혀 끝. 한동안 지속되었던 그 짜릿함의 유희는 강도와 타이밍 조절에 실패해 피를 보고 나서야 끝을…

싫어했던 내 이름
잡문집 / 2013년 10월 24일

내 이름은 이재현이다. 나는 내 이름이 정말 싫었다. 지현이, 지연이… 비슷한 이름 중에도 여자답고 예쁜 이름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재현이, 재현이가 뭔가. 완전 남자이름 같고 아무튼 기분 나빴다. 이렇게 느끼게 된 것은 아마 이름 같은 아이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아주 어린 시절,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아이들은 다 남자아이들이었고 게다가 하나같이 근사한 아이들과는 거리가 먼 아이들이었다. 한마디로 공부도 못하고, 말썽꾸러기에 못생긴 아이들이었다. 선생님이 이름을 부르면 두어 명이 벌떡 일어나는 상황이라니. 아이들은 어김없이 킥킥거리고 그땐 왜 그랬는지 너무나 너무나 창피했다. 이름을 지어 주셨다는 외할아버지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이름 때문에 속상한 나머지, 나중에 커서는 꼭 이름을 바꾸고야 말리라는 결심을 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내게 생각을 바꾸게 한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영어회화 선생님과의 짧은 대화였다. 20대의 어느 날이었던가, 집 근처에 있는 영어학원에서 회화수업을 듣기 시작했는데, 하나씩 영어이름을 정해 발표하는 순서가 있었다. 그 많은 영어이름 가운데 어떤 이름으로 해야 최대한 흔하지 않고, 예쁘고, 지적이고, 싼 티 나지 않고, 우아하며 그리고도 귀여운 느낌이 살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하지만 좀처럼 정할 수 없었고, 드디어는 선생님께 직접 물어봤다. “제 이름은 이재현이라고 하는데, 어떤 이름으로 해야 어울릴까요?” 그 선생님은 내 이름을 몇 번 되뇌더니, 지금 이름이 어감도 로맨틱하고 충분히 매력적이므로 굳이 영어이름으로 바꾸지 않아도 된다고 대답했다. 아, 부모.형제가 그렇게…

4학년2학기 가을
잡문집 / 2013년 9월 29일

이웃 블로그 순례길에 로도스 섬에 살고 계신 올리브나무님 블로그에 들렸다. 아직도 그곳은 여름이지만 10월 어느 날인가 갑자기 겨울이 들이닥친다고 했다. 로도스 섬의 겨울은 가을 없이 곧바로 오는가보다.    댓글을 남겼다. “이곳도 점점 봄 가을이 짧아지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가을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 날이 갈 수록 줄어들고 있어요. 제가 기억하는 가장 아름다운 가을은 대학 4학년의 캠퍼스였습니다. 본관 앞 은행과 플라타너스, 낙엽 태우는 냄새, 이른 아침 쌀쌀한 날씨를 데워주던 자동판매기 커피를 잊을 수 없을 거에요. ^^”     [Indiana Univ. @flicker이미지]   기실 4년 동안 캠퍼스가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동쪽 산기슭에 중앙도서관이 새로 문을 연 것을 빼놓고는. 하지만 이제 마지막 학기라는 생각에 4학년 2학기 가을은 더 아름답고 소중했다. 조교의 잘못이었던가 행정상의 잘못이었던가 기억은 이제 잘 나지 않지만, 우리 전공은 전원 한 과목을 더 들어야 했고 사회교육법을 맡았던 강사 한 분은 공직에 계신 분이었던 까닭에 출근 시간 전에 수업해야만 했었다. 가을이 깊어지자 이른 아침 학교는 왜 이렇게 추웠던지. 우리는 학교에서 가장 맛있다는 본관 자동판매기 커피를 마실 수 있음에 감사하며 그 향기에 즐거워하고 온기로 차가워진 손을 녹였다.    수업을 마치고 나오면서 보이는 교정은 정말 아름다웠다. 은행나무, 단풍나무, 졸참나무, 밤나무… 그중 압권은 국기게양대 옆 커다란 플라타너스였다. 불타오르는 듯한 황갈색 잎들은 나무 자체가 커다랗게 불타오르는 횃불처럼 보였다. 난 11월을 가장 아름다운 달로 기억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쩜 그때 찍어놓은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