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청함을 인하여 – 운명과 역사를 바꾸는 기도 3

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6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누가복음 11:5~13)
간청함을 인하여

간청함을 인하여 – 운명과 역사를 바꾸는 기도 3

1. 세 덩이 떡의 비유

오늘 말씀 본문은 기도에 대한 비유로 누가복음에만 나온다. 집주인은떡 세 덩이를 달라는 친구의 요구에 친구로서가 아니라 ‘간청함을 인하여’ 떡을 내어줬다.

간청의 의미는 무엇인가? 간청은 간곡히 조르는 것이지만, 직역하면 뜻이 달라진다. ‘부끄러움 때문에’라는 뜻이된다. 왜 부끄러움 때문에 떡을 내어 주었을까? 누구의 부끄러움인가. 문 밖에 떡을 요구하는 사람의 부끄러움도 있지만, 요구받는 사람의 부끄러움도 있다.

왜 요구받는 사람이 부끄러울 수 있을까. 유대 사회는 체면과 명예를 중시하는 공동체 사회였다. 우리 정서와 비슷했다. 따라서 손님은 개인의 손님이자 곧 마을의 손님이었다. 손님 대접을 못한 것은 개인뿐 아니라 마을의 수치다. 그러니 ‘부끄럽지 않기 위해’ 명예를 위해 내줬던 것이다.

2. 기도도 마찬가지다

이 비유는 기도에도 적용된다. 하나님께서는 귀찮아서 거절하실 분은 아니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거절 못하시는 이유가 있다. 바로 하나님의 이름, 거룩함, 영광, 명예 때문이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디모데후서 2:13)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42:8)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다.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죽기까지 그 이름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것의 절정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부인할 수 없는 이름을 우리가 사용할 수 있게 해주셨다. 어떻게 사용할 수 있나?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기도할 수 있게 해 주셨다. 우리 기도를 글자 그대로 응답하지 않으시더라도 기도 자체를 거절하지 않으신다 (사실 우리 기도를 그대로 이뤄주지 않으시는 것이 더 좋다는 걸 아시기에 그렇게 하시는 것이지만 ).

3. 다윗의 기도

다윗을 비롯한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이것을 알았다. 그들은 이렇게 기도했다.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시편 31: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편 23:3)

4. 사랑하면 아깝지 않다

이것을 알고 나면, 우리의 기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기도의 출발부터 달라진다. 떨리는 마음으로 기도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찌 이런 자격을 주셨나.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사랑하면 아깝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어떤 것도 아까워하지 않으셨다. 아들까지 내어주셨다. 그리고 급기야 그것은 성령까지 연결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누가복음 11:2)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누가복음 11:13)

우리는 어떤가. 기도의 시간, 헌신, 물질…. 알면 기꺼이 드릴 수 있다.

하나님 이름으로 기도드린다는 것에 이런 의미가 있었나.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는 것이 이런 의미였나. 하나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권세인가. 마치 아버지 인감도장을 들고 사용할 바를 몰라 떨리는 그런 마음이다.

앞으로 드리는 기도는 이제까지와는 다를 것 같다. 당당하지만 떨리는 마음으로 드리게 될 것 같다.

함께 읽으면 좋은 글


이 글은 2020.5.10. 주일설교 ‘운명과 역사를 바꾸는 기도(3)-어찌 이런 자격을 주셨는가?, (내수동교회, 담임목사 박지웅)’을 듣고 나름대로 정리, 요약한 것입니다. 설교 본문과 다릅니다. 설교 본문, 동영상 자료가 필요하신 분께서는 링크된 페이지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반갑습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