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에 대한 비유의 말씀 2가지 – 누가복음 18장

누가복음 18장에는 기도에 대한 비유의 말씀 2가지가 나온다. 하나는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1~8절)이고, 다른 하나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9~14절)다.

하늘나라를 궁궐 속 비밀의 화원으로 비유한다면, 기도는 거기 들어가기 위한 통과의례와도 같다. 너무나 아름답고 좋은 곳이지만, 거기 들어가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2가지 난관이 있다.

  1. 들어가기 어렵다. 문 자체가 열리지 않는다.
  2. 일단 들어가고 나서가 더 큰 문제. 당혹감.

이 두 문제는 기도에 들어가면 누구나 느끼게 된다. 예수님께선 이 두 가지 문제를 비유를 들어 설명해주신다.

<기도에 대한 비유의 말씀 2가지 – 누가복음 18장>

1.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누가복음 18:2~8)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는 기도의 문이 열리지 않는 것, 기도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것을 말한다.

가. 캐릭터

이 비유에 등장하는 캐릭터 자체가 문제다. 불의한 재판관은 하나님을, 과부는 제자들을 가리킨다. 예수님의 12 제자뿐 아니라 오고 오는 세대의 수많은 제자 모두를 말한다. 당연히 우리도 포함된다.

과부

캐릭터가 왜 문제가 될까. 예수님 당시, 여성의 자기 권리 주장은 남자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따라서 그 시절 과부는 법적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는 약자 중의 약자였다. 우리가 지금 가진 개념과는 너무도 다른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었다. 이런 과부가 무슨 수로 재판장을 만날 수 있을까.

불의한 재판관

일반적인 재판관을 만나기도 힘든 노릇인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불의하기까지한 재판관이라니.

나. 비유하신 이유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이런 분이 아니시다. 그렇기에 하나님과 우리 관계도 이런 관계가 아니다. 그런데 왜 이런 비유를 하셨을까?

우리가 기도에 대해 체감하는 막막함을 아시기에 이런 비유를 하셨다. 아무리 애써도 열리지 않는 바위 같은 기도의 문. 믿음에 관계없이 겪게 되는 기도의 어려움 말이다.

기도 자체도 쉽지 않은데, 거기에 우리 기도를 방해하는 마귀의 세력까지 있다. 기도하는 것도 방해할뿐더러, 내가 하는 기도를 듣고 계시기는 한 걸까 의심하게도 만든다.

다. 믿음을 보겠느냐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때마다 이 비유를 생각하자. 내가 잘못 들어간 게 아니다. 불의한 재판관 앞의 과부처럼 불퇴전의 믿음을 갖자.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누가복음 18:8)

예수님께선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다. 이 믿음은 구원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기도할 때 비록 의심이 생겨도 물러서지 않는 그런 믿음이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하는 믿음, 낙망치 않고 기도하는 믿음이다.

기도의 자리에 나갈 때마다 이 말씀을 기억하자. 이 말씀을 통해 위로를 받자.

라. 밤낮 부르짖는 기도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누가복음 18: )

밤낮 부르짖는 기도. 밤낮 부르짖는 기도는 단순한 인내심을 말하지 않는다. 원한을 풀어줄 사람이 여럿이라면, 아니 두 사람만 돼도 이렇게 밤낮 부르짖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원한을 풀어줄 사람은 딱 한 분 이시게에 이렇게 밤낮으로 기도하게 된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는 말씀이 생각난다. 어떻게 하면 쉬지 말고 기도할 수 있을까. 24시간이 기도가 되는 하루, 그런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교제하는 하루하루. 혼자 있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축복을 누리는 매일매일. 그 외에 나머지 축복은 부스러기로 여기는 인생.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다 들려 올라간 에녹이 그렇지 않았을까. 나도 그런 삶을 살고 싶다.

문득 기도가 하나님과의 전화 통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과 우리는 서로 통화 중이다. 유비쿼터스. 하나님의 편재성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늘 접속 상태다. 상대편은 여전히 수화기를 들고 통화 중인데, 나는 통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먹고 딴짓을 한다고 해보자. 상대를 외면하고 무시하는 무례한 짓이다. 이것이 바로 기도를 안 하는 상태가 아닐까. 이런 짓을 밥 먹듯 해왔구나 싶다.

누가 부르짖는가. 택하신 자가 부르짖는다. 기도는 아무나 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에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다.

무엇을 부르짖나. 원한을 풀어달라는 기도다. 원수가 누군가. 하나님의 원수가 곧 백성들의 원수 아닌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내 원수다. 그들에게 당한 원한을 갚아달라는 기도를 하나님은 들어주신다.

2.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8:9~14)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 라니. 자칫하면 ‘겸손’에 대한 윤리강령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다. 기도에 대한 영적인 말씀이다. 하나님 앞, 기도의 존전에 들어간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다.

이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는 ‘일단 기도의 문에 들어선’ 사람이 겪는 결정적 장애, 난관에 대한 것이다. 앞서 말한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가 우리의 믿음을 보시는 관문이라면, 이것은 사단의 공격을 이기고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다.

절벽 같던 기도의 문이 열리고 나면, 이젠 하나님을 뵈옵기에 오는 고통과 절망이 있다. 마치 지하 감옥에서 빛을 보는 게 소원이었던 사람이 밖에 나와 겪는 아픔과도 같다. 막상 빛을 보게 되면 그 빛이 너무 밝아 눈이 먼 것 같고 죽을 것만 같은 고통과 당혹감.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 앞에 서면 바리새인도 세리도 없다. 그저 죄인만 있을 뿐이다. 누가 그 앞에 설 수 있나. 자기 의로는 설 수 없다. 내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정직하게, 솔직하게 인정하고 아뢰는 자만 설 수 있다.

가. 바리새인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바리새인은 가짜다. 정말로 하나님 존전에 섰다면, 이럴 수 없다. 하나님을 못 만났거나 거짓된 외식이다.

나. 세리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이에 비해 세리는 감히 우러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친다. 죄인임을 고백한다. 그리고 바리새인보다 의롭게 여기심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 비유에서 누가 주인공인가. 겉보기에 바리새인 같으나 그렇지 않다. 진짜 주인공은 세리다.

내가 죄인이라고 느껴질 때, 감히 하나님을 뵙지 못하겠다고 절망 될 때, 포기하지 말자. 세리처럼 정직함으로 아뢰자. 이 모습 이대로 날 받아 주소서 하면서 물러서지 말자. 전진 또 전진하자. 더 나아갈 용기가 생기지 않을 때 오히려 더 나아가자.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된다.

▶︎ 내 모습 이대로

▶︎ 나 주의 도움 받고자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시편 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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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20.3.13. 새벽예배3.17 새벽예배 를 드리고 나름대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제 생각과 느낌이 들어있어 설교 본문과 같지 않습니다. 설교 음성자료가 필요하신 분께서는 링크된 페이지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반갑습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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