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들춰본 백미진수 – 맛의 사계를 요리하다

백미진수 - 맛의 사계를 요리하다

다시 들춰본 백미진수 – 맛의 사계를 요리하다

가을이 왔다. 내일 모레면 추석이다. 흔히 가을은 식욕의 계절이라고 한다. 많이는 먹지 않아도 늘 먹는 것을 좋아하는 내가 이번 가을에는 뭘 먹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지 않는다. 다른 식구들이 들으면 웃으려나. 대신 먹을 것을 글로 차분히 풀어낸 것을 접하고 싶어 전에 읽었던 ‘백미진수- 맛의 사계를 요리하다’ 를 다시 꺼내 들었다.

이 책의 저자 단 가즈오는 일본 문인이다. 20대에는 소설을 창작하며 일본에서 보냈고, 30대는 보도반으로 중국 전선을 돌아다녔다. 40대에는 세계를 방랑하며 글을 썼다. 60즈음 몇년간 리스본에서 생활하다 고국으로 돌아가 예순 넷,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백미진수에는 그러한 생활-특히 식생활-의 경험이 녹아있다. 친구와 먹을 것, 추억, 잡학다식이 버무러진 책이다.

1. 맛의 사계를 요리하다

부제가 ‘맛의 사계를 요리하다’ 인 것에서도 드러나듯, 작가가 뽑은 먹을 것들이 봄-여름-가을-겨울 네 계절로 나뉘어 추억과 함께 정리되어 있다.

백미진수 - 맛의 사계를 요리하다2

 

가. 봄

1) 손수 만드는 뉴욕의 맛 – 클램 차우더

‘손수 만드는 뉴욕의 맛’ 에는 조개요리 이야기가 나온다. 주머니 가볍던 대학시절 친구 다자이 오사무와 함께 먹었던 바지락 소금국, 고급이긴 하지만 그래서 그의 입맛에는 맞지 않았던 부야베스, 소탈해서 맘에 드는 클램 차우더를 이야기한다. 그중 간택 받은 것은 클램 차우더. 그것이라면 게으름뱅이 남편의 일요일 요리로도 수월하다 한다. 단 가즈오의 레시피를 빌려오면 다음과 같다.

우선 냄비에 물을 두세 컵 정도 넣어 끓인 뒤 바지락을 집어 넣고 뚜껑을 덮는다. 바지락이 입을 벌리면 바로 불을 끄고 그대로 식힌다.

베이컨은 가능하면 뜨거운 물에 데쳐 작게 조각내고 양파는 잘게 썬 다음 프라이팬에 버터를 넣고 약한 불로 살살 볶는다. 이때 마늘을 조금 넣고 볶는 편이 더 맛있다. 양파가 반투명한 색이 되면 밀가루를 적당량 넣고 볶다가 밀가루, 베이컨, 양파가 흐물흐물 이겨지면 바지락 맛국물을 붓고 덩어리가 생기지 않도록 정성껏 섞는다.

바지락 맛국물은 속에 모래가 가라앉아 있으므로 컵으로 위쪽의 맑은 물을 떠야 한다. 다 풀렸다면 약한 불에서 잘 저으면서 우유를 두 통쯤 부으시라. 적당히 걸쭉하다 싶얼 때까지 우유나 바지락 맛국물을 보태면서 끓인 다음 소금 간을 하면 수프는 완성이다.

이제 건더기 차례다. 바지락을 껍데기에서 분리해 조금 남은 맛국물 속에다 헹궈 모래를 제거한다. 바지락은 기호에 따라 잘게 써는 편이 좋을 수 있다. 셀러리도 잘게 썬다. 그 외에 감자를 작게 깍둑썰기 해서 오 분 정도 소금물에 삶아 꺼내놓는다. 그다음 미리 만들어둔 걸쭉한 수프를 불에 올리고 셀러리와 감자를 넣어 한소끔 끓기 시작할 즈음 바지락을 더해주면 끝이다.

싱겁다 싶으면 소금을 치고 너무 되다 싶으면 우유로 묽히고 부드러움이 부족하다 싶으면 버터를 더 녹인다.

이렇게 하고 식구를 부른다. “여보, 마누라. 완성 됐어. 뉴욕 중앙역 가게의 클램 차우더랑 맛이 똑같아.” 그래서 소제목이 ‘손수 만드는 뉴욕의 맛’ 인가 보다.

바지락 술찜 까지는 만들어도 클램 차우더는 내 손으로 만들어낼 자신이 없다. 밀가루 볶기가 어려워서다. 그래서 내가 만드는 클램 차우더는 켐벨 통조림 뿐이다. 그런데 단 가즈오가 만들어내는 클램 차우더를 보라. 정성을 들여 ‘진짜로’ 끓여낸다.

2) 문어와 오징어를 사랑하는 국민성

일본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처럼 오징어나 문어를 좋아한다. 말려 먹고, 구워 먹고, 쪄 먹고 또 삶고 볶고 지진다. 썰어 전을 부치기도 하는등 그 요리방법도 애정에 비례해 무궁무진하다.

그런데 이 글을 읽으면서 마음이 쓰인 것은 문어나 오징어가 아니라 고래였다.

나는 남극해에서 고래를 몇백 마리 살육하는 광경을 보았지만, 고래의 크기를 한눈에 담지는 못했다. 갑판 위에 올라온 고래 배 부분에 서 있을 때는 배의 줄무늬밖에 안 보이고, 꼬리 부분에 서 있을 때는 꼬리의 기복밖에 못 느낀다. 딱 한 번, 어미 고래 배 속에서 일 미터쯤 되는 태아 고래를 꺼냈을 때만 ‘아하, 고래의 크기가 이정도구나’ 하고 이해했다.

포경에 대해 이야기하면 일본 사람들은 언제나 ‘학술적 목적’ 이라고 답한다. 하지만 이 대목을 읽는 순간 ‘아니, 이것 봐. 이것이 어디가 학문적이고 연구하는 목적이란 말이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전 덴마크령 페로제도의 고래사냥 축제 관련 글과 영상, 사진을 본 적이 있다. 바다는 더 이상 파랗지 않았다. 핏빛 바닷물 위로 검은 것들이 널려 있었다. 그 방법도 정말 참혹하다. 사냥은 먹을만큼만 하면 된다. 재미로 사냥을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나님이 땅을 정복하라는 말은 이런 짓을 하라는 뜻이 아니다. 잘 가꾸라는 뜻이다.

 

나. 여름

1) 보드카 한 모금에 머루 잼 한입

작가는 여름이 다가오면 머루 잼이 생각난다고 했다. 장춘에는 러시아 사람들이 모여살던 곳이 있었는데, 바우스라는 사람 집에 일 년 정도 세들어 살았다고 한다. 말이 방이지 ‘부엌 아궁이 바로 앞에 있는 조선의 온돌 비슷한 회반죽 선반’ 에 이불을 깔고 지냈다고 한다.

주인 부부의 사생활마저 감출 수 없는 좁은 집에서는 요리하는 모습 역시 세세히 볼 수 밖에 없었는데, 그중에서도 머루 잼을 만드는 광경은 잊을 수 없을 만큼 개성적이었다고 한다.

가난한 살림에 커다란 그릇이라고는 세숫대야 밖에 없었나보다. 제대로 씻지도 않은 그 대야에 밖에서 따온 머루와 설탕을 우르르 쏟아 붓고 하룻밤 재웠다가 다음날 풍로에 올려놓고 하염 없이 저어 만들었다. 다 되어가는 잼을 옆에 두고는 침대 그늘에 소중히 아껴둔 보드카를 홀짝였다고.

글을 읽다보면 집주인 바우스 부부는 홍차에 설탕 대신 반드시 잼을 넣어 마셨다는 대목이 나온다. 나는 차에 아무것도 넣지 않고 그대로 마시지만,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이렇게 마셔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집에 딸이 사온 유자감귤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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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다말고 벌떡 일어나 차를 끓여봤다. 유자와 감귤의 향이 향긋하게 느껴지는 것이 예상외로 훌륭했다. 향이 첨가된 홍차와는 다른 자연스러운 향긋함과 단맛. 차 마시는 새로운 습관이 생길 것 같다.

2) 버리기 어려운 여름의 맛

단 가즈오는 샐비어 꽃이 새빨갛게 피기 시작할 무렵이 되면 어쩐지 소년 시절이 흔히 먹던 한여름 음식(특히 동과나 여주)의 맛과 향이 자꾸 생각난다고 했다.

이 책에는 일본에서 흔히 나는 먹을 것들이 가득 나온다. 그럴 때면 공감도는 현저히 떨어지게 되지만, 또 알지 못하는 것을 접하는 신기함과 즐거움이 있다. 내가 여행을 간다한들 여전히 내가 알고있는 것을 바탕으로 아는 것만 찾다 오겠지. 이런 경험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동과가 뭔지는 모르지만 참외 장아찌는 즐겨 먹곤 했다. 술지게미와 된장이 가득 묻어 언뜻 보기엔 아름답지 않은 모습이지만 말끔하게 씻어 얇게 썰어 접시에 올린 몇쪽은 여름에 물에 말아 밥을 먹을 때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그슬린 보리굴비와 참외장아찌. 요즘은 흔히 먹기 어려운 음식이 되었다.

 

다. 가을

1) 소박한 산촌 메밀국수

차가 간신히 지나갈 정도로 좁은 산길이 나타난다. 집 한 채 보이지 않는 쓸쓸한 산속 풍경이 이어지는 통에 메밀국수 파는 가게가 있을리 없다고 걱정할 무렵 ‘핫카이 다이묘진’ 이라는 커다란 돌기둥이 서 있다. … 산 위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짚신 등을 걸어놓은 ‘마야노야’ 라는 산촌 메밀국수집이 한 채 있다. 안에 들어가 메밀국수를 뽑아달라고 주문하면 다서 시간은 걸릴지 몰라도 안개 마을 밭에서 손수 재배하여 딴 햇 메밀로 메밀국수를 뽑아준다. 요 몇 년 사이 이 메밀국수만큼 산촌다운 메밀국수를 먹어본 적이 없다.

차에서 내려 한참 걸어들어가야 겨우 찾을 수 있는 국수집. 단 가즈오는 산촌다운 메밀국수의 전형을 그곳에서 찾았다. 이 글을 쓴 것이 70년대 중반 정도 되었을 터이니, 40년도 더 되었을 터. 그곳은 지금도 산골일지. 그 집은 남아있을지 의문이다.

작가가 산촌다운 메밀국수라고 감탄하고 잊지 못하는 그 메밀국수는 대체 어떤 맛과 모양을 지니고 있었을까. 궁금해서 ‘에치고’에 대해 찾아보았다. 그러다 ‘에치고츠마리 대지의 예술제 마을과 함께 자연 속으로 떠나는 여행‘ 이라는 글을 발견하게 되었다. 작가의 말대로 굽이진 산길에 자욱한 안개 구름이 자욱한 그런 곳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메밀국수 사진은 찾아볼 수 없었다. (혹시나… 하고 찾은 에치고마쓰리 특산품관에 나온 사진이 있습니다. 궁금하신 분은 ‘에치고마쓰리 특산품관’을 클릭해보세요.)

메밀은 기온이 낮고 척박한 산지에서도 잘 자란다. 메밀꽃 필무렵의 무대가 되는 봉평도 강원도다. 밀면도 이북 사람들이 고향 생각에 냉면을 만들어 먹고 싶어도 피난간 부산 쪽에는 메밀이 없어 그 대용으로 만들게 된 것이다.

우리 나라에도 메밀로 만든 음식들이 많다. 국수로는 냉면, 막국수 등이 있고, 메밀묵, 전병, 부꾸미도 있다. 점심때 비빔막국수를 먹었다. 메밀로 국수를 만들었다는 점에 있어서는 에치고의 메밀국수와 마찬가지겠지만, 그 밖의 점에 있어서는 전혀 다를 것이다. 가자미회를 무쳐 얹고 김가루와 참깨를 뿌려 매콤 달콤하게 비벼먹는 그 맛은 먹고 와서도 생각이 나는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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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냄비요리로 맛보는 행복

뜨끈한 국물을 즐기는 냄비요리는 겨울에 제격이다. 하지만 단 가즈오는 가을에 생각나는 모양이다. 중국의 훠궈쯔, 한국의 신선로, 프랑스의 부야베스… 를 이야기 하더니 게으름뱅이 남편이 사오는 대구로 끓이는 대구전골을 이야기한다.

송이처럼 비싼 버섯 말고 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만가닥버섯이나 팽이버섯, 생표고에 두부, 실곤약을 다시마 국물에 넣고 끓인다. 그동안 무에 구멍을 내고 그 안에 빨간 고추를 넣은 다음 강판에 갈면 붉은 무즙이 나온다고 알려준다. 그리고는 유자나 레몬 즙을 넣은 간장을 곁들이라고 하는 대목에서는 공복감이 찾아온다. 침을 삼킨다.

 

라. 겨울

우리 집 해넘이 메밀국수의 기적

가족끼리 졸린 눈을 비비며 제야의 종소리를 들었던 것은 아직까지도 좋은 추억이다. 섣달 그믐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얘진다는 말에 눈을 부릅뜨고 버티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친구 좋아하고 술 좋아하던 작가는 친구를 불러 함께 요리해 먹이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던 모양이다. 어느 그믐 밤에도 친구들에게 먹이기 위해 백화점에서 메밀국수를 공수해왔건만 불량품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자 백화점 측에서는 사과의 의미로 국수 20인분과 커다란 도미를 덤으로 선사하고 갔고, 정월 초하루까지 밤을 새워가며 먹고 마시고 했단다. 그리고 식구들은 20인분이라던 메밀국수를 정월 초이레까지 먹는 기적을 경험했다고.

2. 요리였을까 안주였을까

요리와 안주는 구분하기 어렵다. 하지만 요리가 주가 되면 술이 반주가 되지만, 술이 주인공이 되면 요리는 안주가 된다. 그렇다면 단 가즈오의 요리는 과연 요리였을까 안주였을까?

술을 싫어하면 모를까, 많은 사람들이 별거 아니라도 특별하다 싶은 반찬을 보면 ‘한 잔’ 생각을 하게 된다. 저자는 그런 경지를 넘어선다. 적극적으로 해외생활과 살아온 세월이 쌓아올린 경험을 활용해 이런저런 요리를 즐겼고 그것을 책으로 엮어냈다. 단 가즈오에게 요리와 친구, 술은 뗄 수 없는 것이었나 보다.

어쩐지 방랑식객 같은 느낌이지만 주로 다루는 것은 그래서 안주류. 일본 향토음식과 고유 재료가 많이 나온다. 나처럼 일본을 잘 모르는 사람의 경우에는 공감이 잘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다.

 

 


만화 ‘리틀 포레스트’를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