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사망,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요한계시록 20:14~15)

둘째 사망이란 첫째 사망이 있음을 전제로 한다. 성경이 말하는 사망은 두 가지다.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이다. 첫째 사망은 육신의 죽음 즉 영혼과 육신의 분리를 뜻한다. 그에 비해 둘째 사망은 하나님과 영혼의 분리를 말한다.

죽음은 ‘분리’다. 분리란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첫째 사망은 자연적 죽음이다. 영혼과 육체의 분리다. 이 육체의 죽음은 영원한 죽음이 결코 아니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었다 해도 인간의 본질은 영혼에 있지 육체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 죽음, 둘째 사망 역시 분리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를 말한다. 그렇게 되고 난 후에는 긍휼, 은혜, 사랑, 자비는 단 한 방울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정의만 있을 뿐이다. 정말 무서운 것은 이 둘째 사망이다.

둘째 사망,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
Halemaumau, Lake of Fire, David Howard Hitchcock/wiki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데살로니가후서 1:8~9)

모든 인간은 저주 아래 있다. 그렇다. 지금 이 땅에 있는 사람은 집행유예 상태로 살고 있다. 형벌 아래 있는 것은 사실이나, 아직 제대로 집행되지 않은 상태다. 아직 집행이 남아있다는 뜻이다. 첫째 사망은 저주 아래 있는 맛보기라고 할 수 있다. 제대로 집행되는 것은 둘째 사망 때다.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그 점이다.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태복음 27:46)

여기서 ‘버리셨나이까’하는 것은 몇 번째 사망을 말하는 것일까? 첫째 사망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복음을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르짖은 것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영의 죽음이었다.

우리가 육신의 죽음을 맞이한다고 해서 우리가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육신의 핸디캡이 있어 많은 기능을 잃어버린 사람과 대화를 할 때, 그 사람의 반쪽, 혹은 1/3과 이야기를 나눈다고 하지는 않는다. 대화하는 것은 그 사람의 전인격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육신에 인간의 본질이 있지 않고 영에 있기 때문이다. 육체의 사망을 맛본다 해서 영원한 죽음 – 둘째 사망을 맞은 것이 아니란 것을 명심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죽어 육신이 썩을 지경인 나사로를 향해 자고 있다고 하셨던 것도 인간의 본질이 영에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에게 있어 육체의 죽음은 형벌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마지막 고난1을 통과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마지막 헌신. ‘더 이상 드릴 것이 없어요’ 하며 나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집행 유예기간이 끝나고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는 것이다.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누가복음 23:31)

예수님은 죄가 없는 푸른 나무였다. 그렇지만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둘째 사망을 겪으셨다.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영 버리셨다. 둘째 사망 가운데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리디아서 3:13)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형 집행을 받으신 것이다. 그래서 믿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저주가 없다. 우리가 겪는 육체의 죽음도 저주 아래 있기 때문이 아니다. 영원한 마지막 헌신으로서의 죽음을 통과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은 육신의 고통뿐이 아니었다. 극심한 고통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영원한 저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래서 마른나무가 겪을 둘째 사망을 걱정하신 것이다.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하신 것은 육신의 죽음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다. 소크라테스도 당당히 독배를 들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소크라테스만도 못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걱정하신 것은 둘째 사망이었다.

둘째 사망이란 긍휼이란 한 방울도 없는 상태다. 지금은 사랑의 일부가 남아있다. 아침이면 태양이 뜬다. 은혜와 긍휼이 많이 남아있어 집행유예 상태임에도 그리 불편 없이 살아갈 수 있다. 육신의 죽음은 둘째 사망에 비하면 두려울 것도 없는 상태다. 심지어 주님께서도 몸서리를 칠 정도였다.

우리는 둘째 사망이 없다. 저주가 없다.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그것은 두려워할 것이 아니다. 저주는 사라졌다. 주님께서 절규하면서 둘째 사망 속으로 들어가셨기 때문이다. 우리에게서 둘째 사망을 거둬주시니 얼마나 감사한가.

먼저 돌아가신 부모님, 친지분들은 둘째 사망을 맞으신 것이 아니니 두려워할 것이 없다. 순교의 자리에 선 사람들이 당당했던 것도,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세우신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 앞에는 희망, 영원한 생명만 존재한다.


이 글은 2019.4.18. 새벽기도(1부)를 듣고 나름대로 정리, 요약한 것입니다. 음성자료가 필요하신 분은 링크를 확인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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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notes

  1.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서 1:2~4)

열매맺는나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 10:10)' 고백의 기쁨을 함께 누리고자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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