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장 –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 사람들

로마서 1장 -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 사람들

로마서 1장 –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 사람들

에덴 동산에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은 것을 시작으로 인간은 지금까지 크고 작은 잘못을 저질러 왔습니다. 그 시작은 반역의 영과 함께였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에 그 생각과 행위들은 나올 때 부터 악할 수 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1장을 읽고 무척 놀랐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로마서 1장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로마서 1장 17, 19~20절)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로마서 1장 21~25절 )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에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로마서 1장 26~27절)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로마서 1장 28~32절)

 

인간 안팎으로 하나님을 분명히 보여주심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로마서 1장 19~20절)

 

하나님을 닮은 우리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셨습니다(창세기 1:271). 그리고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창세기 2:72). 이로써 사람은 동물과 달리 영혼을 가지게 되었고, 영원 즉 하나님을 사모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처럼 인격적인(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을 닮은 것이니 신격-하나님의 특성-을 지니게 된 것이겠지만요) 존재로 지음받게되었습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보이심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우리 속에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큰 충격을 받거나 막다른 순간이 되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인간에겐 죄성이 있지만, 양심도 있습니다. 그 양심은 절대선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어떤 일에 꺼림직함을 느낍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 속에 보이신 것입니다.

 

만물을 통해 하나님을 보이심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변을 보기만 해도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자연과 우주만물을 통해 하나님을 보이고 계십니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천지창조의 그 순간부터 그렇게 해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너무나 확실하게 드러나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늘 가지고 다니는 스마트 폰을 그냥 우연히 생겨난 것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삼성이나 애플 또는 그 밖의 기업에서 만들었습니다. 제품이 나오기까지 수 없이 많은 개발과 실험, 디자인 변경과 복잡한 공정을 거친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복잡하고 정교한 인간과 이 우주 삼라만상은 어쩌다 우연히 생긴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스스로 지혜롭다 하나 실은 우준한

우리 안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두셨고, 만드신 만물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보여 알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댈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지 않습니다. 알지만 감사하지도 않고 영화롭게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싫어하고 거부합니다.

왜 그럴까요? 나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내가 정한 기준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의 기준이 ‘나’라는 우상에 맞춰져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방해가 되는 존재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방해만 하는 하나님은 멀리 치워버리고 욕심 채우는데 도움이 되는 우상들을 만들어냈습니다. 농사, 전쟁, 부귀영화… 입맛대로 골라 섬길 수 있습니다. 자기 기준에 맞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은 자기가 종노릇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자유를 잃었다는 것을 모릅니다. 똑똑한척 하지만 알고보면 우준3한 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인간의 타락

인간이 욕심과 의심으로 타락하게 되자 그 격도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더이상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할만한 존재가 아니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영적인 타락은 반드시 육체적 타락을 동반합니다. 당연합니다. 기준이 하나님에서 인간(타락한 인간)으로 바뀌어버린 데다, 그 낮아진 기준에 맞춰 자기가 하고싶은 것은 뭐든 다 하기 때문입니다.

성(性)적 타락

흔히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등의 낱말을 보면 끝에 ‘애(愛)-사랑’이라는 말이 붙어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단어에는 사랑보다는 욕구라는 뜻의 ‘慾’이 더 잘 어울립니다. 사랑은 믿음과 희생 절제를 바탕으로 하지만 욕구는 그저 바라고 원하는 것을 탐할 뿐이니까요.

차별금지법 제정 논란으로 젠더 및 성정체성에 대해 우리는 졸지에 유식해져 버렸습니다. LGBT에 이성애자를 더해 모두 다섯 종류인 줄 알았는데, 14종으로 또 얼마 전에는 33종으로 늘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것도 2016년 기사였으니 지금은 더 늘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성정체성이 성적 취향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 젠더와 취향이 만나면 더욱 다양한 조합이 이루어질 수 있겠지요. 사실 젠더라는 말이 성정체성인 동시에 성적취향을 나타내는 말로 혼용되기도 합니다. 인간의 창의성은 긍정적 방향을 향할 수도 있지만 부정적 방향으로도 한 없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타락한 결과 육체적 타락과 음행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저지른 수 많은 죄와 잘못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까. 이성애자든 성소수자든 성적 방종은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에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그 밖의 다양한 타락양상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이 목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왜 우리는 이런 사람이 되었습니까?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는 사람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로마서 1장 28절)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영어성경에는 they did not like to retain God in their knowledge라고 되어있습니다. 자기들의 지식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한다는 뜻이죠.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tree of knowledge)의 열매를 먹어 그 기준이 이미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되었으니, 그 마음(knowledge)에 어떻게 하나님을 둘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안경을 쓰면 멀쩡하던 세상이 이상하게 보입니다. 한 발짝 내딛는 것이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보는 눈(마음)이 왜곡된 사람은 바른 선택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는 생각과 그것을 바탕으로 쌓는 지식은 그저 사상누각砂上樓閣일 뿐입니다.

벽돌을 구워 만든 바벨탑

옛날 어떤 사람들은 벽돌을 구워 도시와 탑을 건설했습니다. 이름을 내고, 흩어지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꼭대기가 하늘(heaven)에 닿게 하자고 했습니다.

그러고보니 현대인의 모습과 놀랍도록 비슷하네요. 유명해지기 좋아하고 도시에서 모여 살기 좋아하고, 고층 빌딩 세우기도 좋아합니다.

 로마서 1장 -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 사람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부르즈 할리파(아랍어: برج خليفة, 영어: Burj Khalifa)입니다. 할리파의 탑이란 뜻으로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 있는데 높이는 828미터나 됩니다. 하지만 2년 뒤면 이 기록도 깨집니다. 100미터나 더 높은 ‘더 타워‘가 2020년 완공될 예정이라는 군요.

롯데 월드 타워의 높이는 555미터입니다. ‘하늘과 맞닿은 곳 서울 스카이‘라는 이곳 전망대는 세번째로 높다고 합니다. 하늘과 맞닿았다는 것은 상투적인 표현일뿐, 너무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늘 그렇습니다.

지식의 바벨탑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탑 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탑도 마구 쌓아올립니다. 17,8세기 세상(유럽과 신세계)을 휩쓴 계몽주의(Siècle des Lumières-빛의 세기)가 무엇입니까. 인간 이성에 토대를 둔 지식으로 세상의 어둠을 밝히자는 것입니다.

계몽주의의 사상적 기원은 고대 그리스까지 소급된다고 하지만, 그 전부터 빛과 광명, 태양을 자처하는 신(우상)들은 이름만 다를 뿐 늘 있었습니다. 시작은 어디에 있습니까. 끝 가는데를 모르는 교만때문이 아니었습니까.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이사야 14:12)

계몽주의는 어떤 하나의 운동, 사상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다양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있어 서로서로 대립상충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반권위(왕정), 반가톨릭, 이성중심의 합리적사고라는 큰 줄기는 같았습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편찬위원회는 《근대의 사상》이라는 책에서 계몽주의의 특징으로 ‘이성 관용 자율 인권이라는 개념, 사회 정치 사상에 대한 과학적 방법의 적용, 인간의 진보를 가로막는 미신과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들의 권력에 대한 거부’ 등을 꼽았다고 합니다4.

계몽주의가 사회전반과 학문에 끼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을만큼 큽니다. 그것은 사람의 관점, 생각의 변화를 단체로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류와 사회 발전(사실 역사가 발전의 방향으로 굴러가고 있다고 보는 시각 역시 계몽주의자들의 시각입니다)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로마서 1장 -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 사람들
로마신화에 나오는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 계몽의 순간을 표현한 그림. 미네르바가 빛을 비추는 동안 전세계의 종교들이 회합함. 다니엘 호도비에츠키(Daniel Chodowiecki) 1791년 작 /위키이미지

 

하지만 그 태생적 한계 때문에 긍정적인 영향만 끼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인 이상 누구나 욕심과 의심, 불신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위가 그렇습니다. 동전의 양면이란 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닙니다. 유물론, 진화론, 상대주의, 다원주의, 무신론, 자연주의, 실존주의, 포스트 모더니즘, 뉴에이지… 등등의 싹들이 그 토대위에 자라났습니다.

사람들은 실생활보다 학문에 많은 자유를 줍니다. 철학은 다른 학문과 실생활의 바탕이 되는 ‘관점’을 길러주고 이론적 뒷받침이 되는 역할을 합니다. 예술로 북돋아지고 미디어를 통해 확산됩니다. 사람들의 가치관과 행동이 변합니다. 그 결과가 지금 우리들 주변상황입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이제 다른 분야의 사람은 잘 알 수도 없을만큼 갈라지고 뻗어나가 그 탑을 높게 쌓아올리고 있습니다. 얼마전 반인반닭 半人半鷄의 인공배아를 만들어냈다는 내용의 기사를 봤습니다. 읽어내려가면서 하늘까지 닿는 탑을 쌓으려던 사람들이 생각났습니다. 그 끝이 어딘지 알지 못하지만 그저 꼭대기로만 향하려던 애벌레들이 생각났습니다5.

 

왜 우린 그저 달리려고만 하는걸까요? 왜 방향은 상관 없이 그저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 나아가기만 원하는걸까요? 그럴수록 골인 지점과는 더욱 멀어질텐데 말이죠. 그 이유를 로마서 1장을 읽으며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로마서 1장 2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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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notes

  1.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3. 우준(愚蠢)하다 어리석고 둔하다, 생각이나 행동 따위가 어리석고 굼뜨다, 표준국어대사전
  4. 위키피디아>계몽주의>계몽주의의 특징
  5. 꽃들에게 희망을, 트리나 폴러스
  • Jaejun Lee

    너무나도 옳으신 글입니다. 요새는 젠더가 50가지가 넘는다고 합니다. 이 많은 젠더를 차별없이 평등하게 대하는것이 이제 불가능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ㅋㅋ
    우리는 그저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고백만 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을 사람들은 왜 하나님을 떠나려고 안달일까요??

    • https://www.fruitfulife.net 열매맺는나무

      1. 사람은 누구나 차별하면 안되지요.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위하여 이땅에 오셨는걸요. 그리고 종류만 다를 뿐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다르다고, 죄인이라고 차별하는 것은 100달란트 빚진 자가 50달란트 빚진자를 못살게 구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2. 위에 ‘스스로 지혜롭다 하나 실은 우준한’이란 작은 제목에서 말한 것 처럼 이미 꾐에 넘어간 우리는 생각의 기준, 보는 관점이 달라졌습니다. ‘나’라는 우상이 주인이 되었고 그걸 섬깁니다. 사실 그것은 내가 아니라 인간을 꾀었던 것에 놀아나는 셈인데 그걸 모릅니다. 모르는 말, 바른 말은 듣기 싫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솔깃한 말, 귀에 달콤한 말 듣기를 더 좋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