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과 명상, 시선이 다르다

묵상과 명상. 언뜻 생각하기에 별다를 것 없는 것 같다.

여기 나란히 앉아 각각 묵상과 명상을 하는 두 사람이 있다고 하자. 겉으로 보기에 별 차이가 없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큰 차이가 있다. 그것은 작은 하나에서 출발한다. 바로 ‘시선’ 이다.

1.시선이 다르다

묵상과 명상. 이 둘의 가장 큰 차이는 시선에서 비롯된다. 시선은 어디를 또 무엇을 바라보는 방향이다.

명상을 하는 사람은 ‘나 자신’ 을 본다. 내면에 집중한다. 침잠한다. 사고의 표피로부터 점점 더 내려가 다이버들이 잠수하는 것처럼 평소에 빛이 잘 닿지 않는 깊은 곳을 향한다.

묵상을 하는 사람의 시선은 나 자신에서 벗어나 밖을 향한다. 시선의 끝은 밝고 환한 하나님께 닿아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주야로 읊조리며 곰곰이 생각한다. 내면은 하나님께 맡긴다. 내가 고심할 필요가 없다.

내 생각까지 감찰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내주하시기 때문이다. 저 밝고 높은 곳에 계신다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내 안에도 계신가.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곳이 없이 두루 계시다.

2.시선이 닿은 곳

묵상과 명상의 시선이 다르니 그 시선이 닿는 곳도 다를 수밖에 없다.

‘나’란 어떤 존재인가. 나는 사람이다.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다. 죄성이 있어 늘 갈등한다. 거기서 나오는 생각이나 말이 완전할 리 없다. 수도꼭지를 틀었는데 구정물이 나왔다 깨끗한 물이 나왔다 하는 셈이다. 이런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 봤자 신통할 것이 없다. 밖으로 미처 내놓지 못한 더럽고 추한 것들이 가득할 뿐이다.

하나님이 어떤 존재임을 따로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는 선하시며 진리의 빛, 생명 되시고 영원무궁하시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며, 죽기까지 순종하는 분이시다. 더러움과 추함, 죄와 악과 공존할 수 없으시다. 그분으로부터는 참되고 깨끗하고 선한 것 밖에는 나올 것이 없다.

묵상과 명상
Contemplation @wikimedia

3.오늘날 모습

가.명상을 권하는 사회

하지만 세상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묵상 contemplation이 아니라 내면을 들여다보는 명상 meditation을 권한다. 길을 걷다 간판을 봐도, 신문 광고를 봐도 그렇다. 인터넷 세상도 그렇다. 명상, 뇌호흡, 기수련, 호흡명상, 브레인 피트니스, 기공, 기체조, 단학, 마음수련…. 명상 하나를 구글에서 찾아도 수많은 관련 사항들이 딸려 나온다. 운동 같으나 운동이 아니고, 종교 같으나 종교는 아니며, 과학 같으나 과학도 아니다.

정부 출연 연구기관인 ‘한국뇌연구원’과 비슷한 이름의 ‘한국뇌과학연구원’이 있다. 여기서 주최한 ‘브레인 명상 컨퍼런스’에 과기부가 후원 명칭을 승인했다가 과학계의 반발로 행사 직전에 취소한 일1도 있었다. 취소의 법적 근거는 ‘후원 명칭에 관한 규정 제 6조'(승인요건을 위반하거나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기관이나 단체에 대해서는 승인 취소가 가능하다)였다고 한다.

겉은 비슷하나 속은 다르다(혹은 정반대거나). 끝이 다른 것이 이단 異端이고, 비슷하나 아닌 것이 사이비 似而非다.

나.의식의 하부, 창작자의 황금어장?

음악, 미술, 문학…. 창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종종 하는 말이 있다. 어떤 존재가 있어 ‘불러주는 대로’ 쓰기만 했다는 말이다. 수많은 이야깃거리 가운데 유명한 것이 조안 롤링의 해리포터, 스트라빈스키의 발레곡 봄의 제전등이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에서, 의식의 하부로 내려가는 것의 위험성을 이야기한 바 있다.

소설가의 기본은 이야기를 하는 것 tell a story 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말을 바꾸면 의식의 하부에 스스로 내려간다는 것입니다. 마음속 어두운 밑바닥으로 하강한다는 것입니다. 큼직한 이야기를 하려고 할수록 작가는 좀 더 깊은 곳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큼직한 빌딩을 지으려면 기초가 되는 지하 부분도 깊숙이 파 들어가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치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할수록 그 지하의 어둠은 더욱더 무겁고 두툼해집니다.

작가는 그 지하의 어둠 속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 – 즉 소설에 필요한 양분 – 을 찾아내 손에 들고 의식의 상부 영역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형태와 의미를 가진 문장으로 전환해나갑니다. 그 어둠 속에는 때로는 위험한 것들이 가득합니다. 그곳에서 서식하는 것은 때때로 다양한 형상을 취하며 사람을 미혹시키려 합니다. 또한 표지판도 지도도 없습니다. 미로 같은 곳도 있습니다. 지하 동굴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자칫 방심하면 길을 잃고 헤매고 맙니다. 그대로 지상에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 어둠 속에는 집합적 무의식과 개인적 무의식 등이 뒤섞여 있습니다. 태고와 현대가 뒤섞여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해부하는 일 없이 그대로 들고 돌아오는데 어떤 경우에 그 패키지는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pp.188~189)

사회가 어지러울 때 사람들은 반작용으로 고요하고 싶어 한다. 안정되고 평안하고 싶어하는 것은 본능이다. 하나님은 주야로 하나님을 말씀을 묵상하라고 하신다. 사람들은 오래전에 하나님을 잊었지만, 유전자에 남아있는 희미한 흔적은 묵상에 목말라한다. 오늘날 이런 명상 산업들이 팽창되어가고 있는 것은 그런 욕구가 그만큼 크다는 증거다.

하지만 세상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묵상 contemplation이 아니라 내면을 들여다보는 명상 meditation을 권한다. 당연한 일이다. 세상이란 공중권세 잡은 마귀가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는(베드로전서 5:8) 곳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기회를 권할 리 없다. 겉모습은 비슷하나 내용은 다른 대체재를 제공한다. 그것이 그럴듯하게 포장된 명상이다. 기독교 내부로 들어온 명상의 다른 이름이 관상이다. 믿는 자들은 포장지에 속지 말고 근신하고 깨어 그 속에 담긴 내용물을 잘 파악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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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notes

  1. 뇌호흡은 과학이 아니다, 2019.5.2.4.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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