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것은 마찬가지건만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창세기 2:25)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창세기 3:7)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세기 3:10)

벗었다니, 입은 옷이 없었는데

‘벗었다’는 것은 뭔가 입고 있었음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아담과 하와는 처음부터 옷을 입은 상태가 아니었으므로 뭔가 달라진 상태를 표현하려면 오히려 ‘입었다’ 가 적당하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를 봐도 옷을 입은 사람이 없다. 주변의 다른 동물을 봐도 마찬가지다.

‘옷’이나 ‘입는다’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을 텐데 어떻게 ‘벗는다’라는 개념이 생겼을까. 그들에게는 벗은 상태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래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게 되었을까?

옷도 없는데 벗었다는 것은 어떻게 알게 되었고, 벗었는데 두려운 것은 또 무엇일까? 벗은 것에 대한 개념이 생겼다 할지라도 보통은 부끄럽다거나 창피하다는 것이 정상적인 반응 아닐까? 대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

그 사이, 그들에게는 한 사건이 있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어버린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아담은 그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정녕 죽는다는 경고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먹고 말았다. 그 결과 눈이 밝아졌다. ‘정녕 죽으리라’ 했는데 죽기는커녕 눈이 밝아졌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선악과 사건 이후, 그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죽고 죄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인간은 절대 선, 절대 진리를 놓치고 저마다의 잣대를 갖게 되었다. 사람은 하나님 같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에 기준이 절대적일 수 없다. 가치관 충돌은 불가피한 일이다. 상대주의가 시작된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니라 선악과를 먹었을 때부터였다.

나무에서 꺾여 떨어져 나간 가지는 푸르름도 잠시, 시들어 죽고 만다. 사람도 그렇다. 사는 것 같으나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1 같은 존재다.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았을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살았다 하지만 죽은 존재가 바로 우리다.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았던 존재들, 존재 그 자체로 온전해 하나님 외에 더 이상 무엇(예를 들어 옷)이 필요치 않던 그들에게 변화가 일어났다. 가치판단기준이 바뀌자 수치와 두려움이란 것이 나타났다. 무화과 나무 잎으로 가리려했고 두려워 숨었다. 죄라는 것이 마음 속에 생긴 것이다.

벌거벗은 것은 마찬가지건만, 다른 것도 바뀐 것은 하나도 없건만 가장 중요한 것이 달라졌다. 내가 바뀌었다. 부끄럽지 않던 것이 부끄럽게 느껴지고 두려움이라는 것이 생겨버렸다. 처음 느껴보는 그 기분이 얼마나 생소하고 이상했을까.

세상은 분명 바뀐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뒤집혀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기분. 내가 다 망쳐버렸다는 자책과 낭패감. 하나님처럼 된다더니 이게 뭐야 속았구나 싶은 데서 오는 분노와 원망…. 그들이 얼마나 당황스럽고 두려워했을지는 짐작도 되지 않는다.

벌거벗은 것은 마찬가지건만
Adam and Eve expelled from Eden, detail of the pulpit carved by Hendrik Frans Verbruggen (1699), St. Michael and St. Gudula Cathedral, Brussels, Belgium.

무화과 나무 잎으로는 가릴 수 없다

멀쩡했던 내가 부끄럽게 느껴지다니. 하나님께서 손수 빚어 만드시고 심히 좋았더라2하신 그 존재가 자기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게 하다니 뱀이 참 큰 일을 했구나 싶다.

스스로 수치를 가리려 얼마나 애를 썼을까. 하지만 사람의 노력이 죄와 수치를 가릴 수 없다. 없는 것으로 만들 수도 없다. 무화과 나무 잎으로는 가릴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세기 3:21)

가죽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한 짐승이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한다. 사람의 부끄러움-죄를 가리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했다. 먼 훗날 여자의 후손이 희생양이 되어 단번에 온전히 우리 죄를 없이 하시고 사단의 세력을 멸하여 창조를 완성하도록 죄를 지은 그 순간 예비하셨다.

태초에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셨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빛이었다. 그분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를 모두 걸머지고 내 이름표를 달고 대신 죽으셨다. 뿐만 아니라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다.

아담 이후, 사람들은 오실 예수님을 믿고 기다리며 살았다. 우리들은 오신 예수님, 다시 오실 예수님을 믿고 기다리며 산다. 하나님은 유대민족의 부족신이 아니다. 온 인류를 지으신 한분 하나님이시고 끝까지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주고 이제까지 기다려주시는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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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notes

  1. 야고보서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2. 창세기 1: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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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맺는나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 10:10)' 고백의 기쁨을 함께 누리고자 글을 씁니다.

반갑습니다. 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