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벌레와 메모광

책벌레와 메모광, 정민

책벌레와 메모광

책벌레와 메모광, 정민

이번주 내내 다산과 연암, 이덕무에 관한 글을 읽고 있다. 노트 쓰기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노트쓰기로 당신의 천재성을 끌어내세요’ 라는 세바시 영상을 알게 되었다. 이 동영상을 보다 보니 전에 공부했던 다산 정약용의 메모/노트법이 떠올랐다. 그렇게 뒤져서 발견한 책이 오늘 소개하려는 ‘책벌레와 메모광’ 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크게 2부로 나뉘어 있다. 제목 그대로 1부는 책벌레, 2부는 메모광을 다루고 있다. 서른가지 작은 이야기를 통해 고전을 재미있게 소개해줄 뿐 아니라, 작가 본인의 메모와 활용 비결도 함께 알려주고 있다.

1. 책벌레

가. 장서인을 찍는 태도

‘내 것이오’ 하고 책에 찍는 도장을 장서인이라고 한다. 하지만 책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느다. 마치 물처럼 다른 사람의 손으로 들어갈 일이 생긴다. 이때 한국, 중국, 일본 사람들의 태도가 어떻게 다른지 구경하는 것은 자못 흥미롭다. 구경한다고 했는데, 정말 구경할 수 있다. 증거사진도 실려있다.

나. 고서 속의 은행잎과 운초

오래된 책을 보면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책벌레가 살살 기어다니는 것을 목격할 때가 있다. 그래서 자는 방에 책장이 있는 것이 싫다. 그런데, 옛날 사람들은 책벌레를 막기 위해 은팽잎이나 향초를 책 사이에 끼워 두었다고 한다. 책벌레 두어와 맥망에 관한 이야기는 옛날 이야기를 듣는 것만 같다.

다. 오징어 먹물

오징어 먹물은 그 특성상 매끈한 종이에 쓰면 펄이 들어간 것 처럼 반짝거리고, 시간이 흐르면 썼던 글씨가 사라져 사기꾼들이 많이 애용했다고도 한다.

라. 이덕무와 책에 관련된 아홉가지 활동

1) 용서인이란?

용서인이란 돈을 받고 남의 책을 대신 베껴주는 사람을 말한다. 가난한 선비중에는 용서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간서치(책만 읽는 바보)’ 라는 말로 잘 알려진 이덕무도 이렇게 글씨로 품을 팔아 먹고 살았던 적이 있다고 한다.

2) 어려웠던 형편

이덕무는 조선의 2대 임금 정종의 막내 무림군의 10대 손일뿐 아니라 몹시 박식했다. 하지만 서얼 출신이라 정식으로 관직에 나아갈 수 없어 정조임금이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하기 전까지 형편이 아주 어려웠다. 친구와 주고 받은 편지마다 책을 빌려주고 빌려오는 내용이 많았는데, 그중에 다음 구절은 정말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창가의 해가 따스해 벼루의 얼음이 녹으니, 예전의 일과를 되찾고자 하오. 전당시全唐詩를 바꿔서 보내주면 좋겠소.

‘창가의 해가 따스해 벼루의 얼음이 녹으니’ 라는 것은 시적인 표현인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저 사실을 그대로 적은 것이었다.

3) 구서재(九書齋), 책과 관련된 아홉가지 활동

-독서(讀書) : 으로 소리내서 읽기 (좋은 글은 가락이 살아난다)

-간서(看書) : 으로 읽기

-초서(抄書) : 책의 중요한 부분을 으로 베껴가며 읽기

-교서(矯書) : 교정해가며 읽기

-평서( 評書) : 감상과 평을 남기며 읽기

-저서(著書) : 읽는데 그치지 않고 제 생각을 펼치기

-장서(藏書) : 책을 간직하기

-차서(借書) : 남에게 책 빌리기

-포서([曝書) : 책 말리기

마. 초서법, 베껴쓰기의 위력

다산 정약용의 초서독서법은 유명하다. 초서법은 요즘으로 말하면 독서카드 정리법이라고 하겠다. 책을 읽다 요긴한 대목이 나오면 따로 베껴 쓰고 거기에 자기 나름의 감상이나 각주를 달아놓았다가 주제별로 정리해 놓는다. 이렇게 해두면 나중에 책으로 엮을 때 아주 유용하다고 한다.

다산은 이런 공부법을 얼마나 강조했는지, 그 제자치고 이렇게 엮은 책(총서) 하나쯤 없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오죽하면 개인 총서를 남겼느냐 하는 사실로 다산의 진짜 제자여부를 판별할 정도였을까.

다산의 독서법은 초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아니지만 다산의 독서전략 을 보면 ‘다산의 삼박자 독서법’이 소개되고 있다.

  • 정독 – 한 가지 사실도 관련된 다양한 책을 함께 읽어 균형된 시각을 갖게하는 독서법. 대표되는 책은 여러번 깊이 읽어 정확하게 이해한다.
  • 질서 – 책을 읽다 깨달은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적어가며 읽는 것.
  • 초서 – 중요한 구절이 나오면 베껴쓰는 독서법. “먼저 주관이 잡혀있어야 내게 필요한 것, 중요한 것, 버릴 것을 골라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책도 보탬이 되는 것만 뽑아 모아두고 그렇지 않은 것은 하나같이 눈에 두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하면 100권의 책도 열흘 공부에 불과하다” 고 한다.
    • 초서의 4단계 = 주제정하기>목차정하기>뽑아서 적기>엮어서 연결하기 —여기에 경험을 더하면 하나의 작품이 된다.

이 책의 저자도 베껴쓰기의 위력에 대해 이야기 한다.

나도 새로 다산의 편지나 증언첩을 찾게되면 우선 붓으로 전체 원문을 도박또박 베껴쓰는 것으로 분석을 시작한다. 어지러운 흘림 글씨 상태로는 머리에 들어오지 않던 글이 옮겨쓰는 과정을 한 번 거치고 나면 신통하게도 행간의 맥락까지 선명하게 잡힌다.

베껴쓰기 공부의 위력은 해보지 않고는 잘 알 수가 없다. 일단 손글씨로 베껴쓴 뒤에 거기에 붉은 먹을 찍어 구두를 떼고 메모를 한 뒤, 그 다음에 컴퓨터에 입력해서 번역을 하는 순서다. 초서의 단계를 건너 뛰면 글의 내용도 수박 겉핥기로 대충 읽고 마는 경험을 수 없이 했다. (107쪽)

책은 눈으로 볼 때와 손으로 쓸 때가 확연히 다르다. 손으로 또박또박 베껴쓰면 내 것이 된다. 눈으로 대충대충 스쳐 보는 것은 말달리며 하는 꽃구경일 뿐이다. (109쪽)

 

 

2. 메모광

한때 적자생존이란 유행어가 있었다. 적는 자가 살아남는다는 뜻이다. 기억에는 한계가 있으니 잊지 말아야할 것들이나 번뜩 떠올랐다 사라지는 아이디어는 적어놓지 않으면 안된다. 나이가 들어선지 정보가 너무 많아선지는 모르지만 나도 스마트폰 캘린더에, 몰스킨 다이어리에, 포스트잇에 여기저기 써놓는다.

가. 책속 메모와의 대화

후지쓰카 자카시1는 메모광이어서, 책을 읽다 필요한 정보는 책의 여백에 써놓곤 했다. 긴 메모는 다른 종이에 붓으로 써서 끼워놓았는데, 본문 내용에 참고가 될만한 자료를 다른 책에서 찾아 그것이 몇쪽에 있는지 다 적어 놓았다고 한다.

‘이렇게 한 권의 책이 다른 한 권의 책을 불러낸다. 이런 네트워크는 신기하다 못해 신통하다’ 라고 감탄한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하이퍼 텍스트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는 메모를 함으로써 그 많은 고전들을 종이로된 하이퍼 링크로 묶어놓았다.

나. 메모 관리법

책의 중요한 내용을 베끼고 날아가는 생각을 써서 붙잡아 놓았다고 해도 필요할 때 찾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메모도 조직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명나라 오승백은 책을 읽을 때 한쪽에는 옹기, 한쪽에는 나무궤짝을 두고 역사서를 읽다 생긴 의문을 적은 종이는 옹기에, 경전을 읽다 떠오르는 생각은 궤짝에 넣어두었다고 한다. 처음부터 디렉토리 또는 폴더를 만들어 분류하고 저장했던 것이다. 나중에 따로 분류하는 작업을 할 필요가 없다.

다. 재빨리 적는 질서법

질서疾書란 섬광 같은 깨달음(묘계妙契)이 흔적 없이 날아가기 전에 재빨리 적는 메모다. 작가는 퍼뜩 떠오르는 생각을 잡아채는 묘계질서야 말로 메모의 꽃이라고 하고있다.

공부란 제 말 하자고 하는 일이다. 평생 앵무새처럼 남의 말이나 주워모아 그것을 공부의 보람으로 알면 슬픈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아이들에게 늘 하는 말이 있다. 책은 교과서도 아니고 성경도 아니다. 어떤 책을 읽을 때 그것을 절대적인 진리라고 생각하지 마라. 책 내용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탐구의 대상이다. 다르게 생각해보고 비틀어 생각해봐라. 의문을 가져봐라. 작가와 대화해봐라. 책 옆에 그런 것들을 써봐라. 네 소리를 내어봐라.

대학교육은 그런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많은 학교에서 교수의 강의를 그대로 답안으로 적어내야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2 그런 풍토에서 어떻게 학문을 할 수 있을까. 안타까운 일이다.

라. 사설, 구석에 숨어있는 의미

사설僿說은 자질구레한 설명, 잗다란 이야기를 말한다. 僿라는 글자가 잘게 부순다는 의미다. 이익의 성호사설이라는 책 제목을 통해 이미 우리가 이미 많이 들어봤다. 단지 한자를 생각하지 않아 낯설 뿐이다. 성호사설은 성호 이익이 책을 읽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발견하면 놓치지 않고 그때그때 메모해 두었다가 자기 의견을 보태 하나의 체제로 정리한 책이다.

삶의 천진한 즐거움은 어디서 오는가.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삶이 그대로 보인다. 나는 무엇이 좋은가.

좋아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삶이 그대로 보인다니, 공책 속에 한 사람의 관심사가 그대로 담기는 것과 같은 이치인가 보다. 나는 책을 읽고 인터넷에서 자료를 뒤지며 어떤 것의 유래, 근원을 살피고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재미있다. 음식, 언어, 문화, 민족, 심지어는 욕도 그렇다. 깊이는 없지만 그저 재미있어서 하는 일이다. 그리고 글로 써서 블로그에 올리는 것도 좋아한다.

작가는 이런 일들도 ‘천천히, 오래, 그래서 멀리, 조급증을 버리고 즐기며 하라’ 고 조언한다. 바쁜 가운데 스스로 만들어 찾는 꿀맛 같은 휴식과 여유를 어떻게 가꿔나가느냐가 관건이라는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전에 정리해 올려뒀던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관련 글을 아무리 봐도 블로에서 찾을 수 없었다. 뒤져보니 에버노트에 3강 까지 정리하고 나머지 여섯 강을 채우지 못했다. 아마 블로그에 올리지 못한 이유가 끝까지 정리하지 못해서였나보다.

재미있는 점이 있다. 두 책 – 다산선생 지식경영법과 책벌레와 메모광 – 의 저자가 모두 정민 한양대 교수였다. 4년전 즐겁게 읽었던 책과 바로 어젯밤까지 읽었던 책의 저자가 같다니 놀랍다. 조만간 아쉬운대로 다듬어 올리기로 하겠다.

 


관련자료

교수 강의 그대로 적는 서울대 학생들 학점은 좋아도 창의적 사고력 부족/중앙일보/2014. 10. 24.

종이와 친해지기 – 생각정리를 위한 노트의 기술

0 이 글이 마음에 드셨나요? 왼쪽 회색 하트를 눌러 빨갛게 만들어주세요. 로그인 필요 없어요. ^^

Footnotes

  1. 후지츠카 치카시.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 교수출신 추사 김정희 연구가. 세한도를 한국(손재형)에 돌려주고 3개월 뒤, 미군 동경대 공습으로 그의 조선보물창고가 거의 타버렸다고 한다. 사후 추사관련 1만여점을 과천에 기증했다고 한다.
  2. 교수 강의 그대로 적는 서울대 학생들 학점은 좋아도 창의적 사고력 부족 – 교육과 혁신 연구소 이혜정 소장이 진행했던 2009년 학점을 잘 받는 학생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