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 예수님의 2가지 다른 답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 17:20~21)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라.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번뜻하여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췸 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누가복음 17:22~24)

1.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 예수님의 2가지 다른 답

누가복음 17장 20절부터 37절까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니이까’ 에 대한 예수님 말씀이다. 그런데 찬찬히 읽어보면 바리새인들과 제자들에게 각각 2가지 다른 답을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 바리새인들에게 주신 말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 17:20~21)

20절부터 21절 말씀은 바리새인들의 질문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답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한 질문에 ‘하나님 나라는 이미 너희 안에 임해있다. 그걸 모르겠느냐’고 답하신다.

바리새인들은 ‘구별된 자(페루쉼 perushim)’라는 뜻이다. BC2세기부터 AD1세기까지 가장 강력한 종교적 당파였다. 율법과 전통을 지키려는 열정이 지나친 나머지 ‘외식’에 치우쳤고 ‘장로들의 유전’마저 끌어들였다. 성경적 근거가 없는 인간의 전통수호는 오히려 그들이 지키려는 ‘율법’을 거스르는 행위였다. 하지만, 그들은 책망을 들어도 깨닫지 못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마태복음 15:3)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일 계획에 틈만 나면 예수님을 공격했다.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니이까 하는 질문도 궁금해서 한 질문이 아닌 일종의 함정이었다.

사실 그들은 진정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잘 몰랐다. 하나님 나라의 임재성에 대해 무지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통치하시고, 하나님 나라는 우리 중에 이미 임해있음을, 현재진행형임을 몰랐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나.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라.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번뜻하여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췸 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누가복음 17:22~24)

제자들에게는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다른 답을 하신다. 왜 그럴까? 제자들은 이미 아는 사실이기에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에게 주신 말씀은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완성해 나아갈 것인지에 대한 제자도, 제자의 길에 대한 말씀이었다.

1) 때가 이르리니

그 내용 중 첫 번째는 바로 ‘때가 온다’는 것이다. 여기서 때란 인자의 날, 재림의 날을 말한다. 예수님이 곁에 계시지 않은 것만 같은 때, 너무나 뵙고 싶을 때가 온다. 재림의 날을 고대할 때가 온다. 하루만이라도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어도 있지 못할 때가 온다는 것이다.

2)재림과 초림은 그 방식이 다르다

예수님이 처음 오셨을 때, 베들레헴 작은 마을 한 마구간에 오셨다. 하지만 재림은 다르다. 번개가 번쩍하면 온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모를 수 없듯 그렇게 오신다. 온 우주가 하나님의 도래하심을 한꺼번에 다 보게 된다.

3)현재는 계속되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현재라는 일상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반드시 끝이 온다.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일상은 저절로 그러려니하는 자연적自然的인 것도 아니요, 당연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간섭, 보존의 손길이 있어야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시기에 가능하다.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3)

하나님께서 손을 놓는 순간, 그날 그때가 우주 역사의 마지막이다. 마지막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오늘도 하나님의 섭리와 손길을 느끼고 믿는 사람이다. 오늘 하루의 일상이 당연하다 여기지 말자. 정신을 번쩍 차리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계한을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계한을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흉용하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 (예레미야 5:22)

이 사실을 믿는 데서 제자도가 출발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역사로 이 땅에서 이뤄지길 바라고 믿자. 세상이 어수선하면 그럴수록 마음이 조급해진다. 이럴 때 자꾸 인간적인 방법을 생각하게 된다. 나라와 민족, 교회, 가족, 내 인생…. 모두 마찬가지다. 주님의 손길, 주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길 바라고 믿자.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함께하심의 축복을 누리는 길이다. 이것이 노아가 느꼈던 바로 그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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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20.3.9. 내수동교회 새벽예배 를 듣고 나름대로 정리, 요약한 것입니다. 설교 본문과 다를 수 있습니다. 설교내용을 듣기 원하시는 분들은 링크된 페이지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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