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말씀을 찾는 것은 하나님을 찾는 것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한복음 1:1~2) – 하나님 말씀을 찾는 것은 하나님을 찾는 것

1. 말씀이 곧 하나님이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것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을 많이 읽어보자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기독교의 가장 본질적 특징, 근원적 차별성을 알고 믿어 행해야 한다.

성경은 말씀(logos)이 곧 하나님이라고 한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가. 말씀 있는 그 자리에 항상 그 존재가 함께하는가

세상에는 많은 선생이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사상과 종교도 그 가르침이 곧 그 선생님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말씀이 곧 그 말씀을 한 사람이라면, 그 가르침이 있는 곳에 그 존재 역시 함께 실존해야 한다. 석가가 그럴 수 있는가. 칼 막스가 그럴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하기에 가르침과 가르침을 준 존재가 하나가 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시고, 어디나 존재하시기에 말씀과 늘 함께 계신다. 그러기에 말씀은 곧 하나님이 된다.

동상을 세우는 이유가 뭔가. 북한에서 김일성 동상을 왜 만들어 세우는가. 그 자리에 없기 때문이다. 없지만 있는 것처럼 생각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것의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하셨다. 우상뿐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은 어디나 늘 계시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든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따로 형상을 만들 필요가 무엇인가. 어떤 사상이나 종교가 흉내 낼 수 없는 것이 바로 이것 아닌가. 하나님은 곧 말씀이시며,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다. 기독교는 여기서 출발한다.

나. 말씀과 하나님이 함께 존재한다는 확신이 있는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요한복음 6:63)

예수님께서 이른 말씀이 영(성령)이고 생명이라고 하셨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다. 이런 확신이 없다면 성경을 읽은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히브리서 12:22~24)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바로 그 자리가 시온 산이며 하나님의 도성이며 하늘의 예루살렘이다. 하나님의 존전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예레미야 23:24)

하나님은 천지에 충만하시다. 없는 곳이 없으시다. 어디나 계실 수밖에 없다. 내가 가는 곳 어디에나 계시는 곳은 물론, 내가 없는 곳에도 계신다.

2. 함께하심의 축복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여호수아 1:5~9)

5절과 9절을 보자. 하나님께선 여호수아에게 ‘너와 함께 있겠다’ 고 하셨다.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겠다고 하셨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궁극적인 축복’이다.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고 길이 평탄하게 되는 것은 궁극적 축복에 따르는 부가적 축복, 부스러기 축복에 불과하다.

가. 함께하심의 축복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함께하심의 축복을 누리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6, 7, 8절에 나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켜 행해야 한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입에서 떠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주야로 묵상하며 지켜 행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늘 우리와 함께하시는 축복을 얻게 된다.

우리 입에서 떠나게 하지 않는 것, 주야로 묵상하는 것은 그저 기계적으로 읽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성경을 읽는 것 자체는 좋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굳이 점수를 매기자면 30점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말씀을 대할 때 우리의 자세를 바로 해야 한다. 하나님께선 24시간 우리와 늘 동행하고 싶어 하신다.

나. 말씀을 대하는 2가지 자세

말씀을 대할 때 사람들은 크게 2가지 자세를 갖게 된다. 하나는 말씀을 습득(학습)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말씀을 하나님과의 만남(교제) 으로 생각하는 태도다.

이것은 내부의 미묘한 차이다. 겉으로 봐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작은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

다. 말씀을 자꾸 학습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게 되는 이유

성경을 읽고 학습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학습의 대상으로만 여기게 되고 거기서 그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 보면 자꾸 습득용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 이유가 뭘까.

1) 도구의 특수성 때문에

성경은 텍스트로 되어있다. 글자는 정보를 기록해 보관하는 기능이 있다. 성경책이란 도구의 특수성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자꾸 정보 획득에만 치우치려는 경향이 있다.

2)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다. 우리가 말씀을 읽는 그 자리에도 계신다. 하지만 육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말씀의 자리에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확신을 다지고 지켜야 한다.

3. 성경 봉독과 낭독

가. 성경낭독

설교를 통해 여기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안받았다. 바로 성경을 소리 내 읽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묵상’한다는 말을 보통 소리 없이 읽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묵상에 쓰이는 한자 默(잠잠할 묵)과 想(생각할 상) 때문이다. 하지만 묵상의 원래 뜻은 그렇지 않다. 묵상을 히브리어로 ‘하가 hagah’라고 한다. 이는 소리를 내어 중얼중얼 읊조리는 것을 말한다.

글자의 특징이 정보 보관이라면 소리의 특징은 만남의 현장에서 교제하게 하는 도구다. 만나서 글자로 소통하지는 않는다. 싸우고 난 부부나 친구라면 모를까. 문자로는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는 분위기나 감정도 대화로는 가능하다.

나. 성경 봉독

교회에서 설교 전에 성경을 봉독하는 것은 미리 한번 읽어보라는 뜻이 아니다. 성경 봉독은 소리를 통해 하나님의 존전 앞에 서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선 설교보다 중요하다.

다. 잠자기 전

잠들기 전, 목사님께선 정성과 마음, 사랑을 담아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에게 읽어준다고 한다. 그러고 나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되고 여운이 남아 그 감동으로 나도 모르게 성경 말씀들이 외워진다고 한다.

또 하나 재미있는 비유를 들었다. 컵라면에 관한 비유였다.

  •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으면 먹을 수 있게 된다.
  • 성경을 소리내어 읽으면 (문자가 살아있는 말씀으로) 살아난다.

성경을 읽는 것은 단지 스터디가 아니다. 성경을 읽는 그 순간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의 현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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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여호와를 찾으라(3) – 하나님을 찾는 것은 그의 말씀을 찾는 것이다’, 내수동교회 주일설교(2020.3.8. 담임목사 박지웅)를 듣고 나름대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설교 본문과 다를 수 있습니다. 설교 본문이나 동영상 자료가 필요하신 분들은 아래 링크 페이지를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 내수동교회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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