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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

성선설 & 성악설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 2

학교 다닐 때 도덕, 윤리 시간은 거의 철학 시간이었던 것 같다. 흔한 여러 질문 가운데 생각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 하는 것이었다. 날 때부터 인간이 선한가 아니면 악한가 하는 의문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 시험공부 한다고 외웠던 ‘맹자의 성선설, 순자의 성악설‘ 등이 기억난다.

철학과 정치는 먼 것 같지만 가깝다. 리더가 어떤 철학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방향이 달라진다. 군주제 사회에서 통치자의 철학은 그 나라의 운명이고 흥망성쇠가 달린 문제였다.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가 서로 앞다퉈 자기의 철학과 존재를 어필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입신양명하고자 했던 사상가와 통치 철학이 절실했던 여러 왕들의 필요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인간의 본성을 고찰했던 것은 다분히 필요에 의한 접근이었고, 어찌 보면 수단에 가깝다 하겠다.

사실 철학자가 아니라도 궁금할 수 있다. 착했던 아이들이 세상의 때가 묻고 잘못 배워 나쁘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악했던 아이들이 교육에 의해 착하게 다듬어지는 것일까? 둘 다 가능할 것 같다.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성경에 의하면, 슬프게도 우리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악한 존재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주저함 없이 인간의 악함을 기정사실로 간주하고 말씀하신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태복음 7:11)

다윗도 시편에서 잉태될 때부터 죄인이었고, 태어날 때부터 악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편 51:5)

무슨 일일까. 최초의 인류가 마귀의 꼬임에 넘어가 반역에 가담한 이래, 인간은 저주 아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을 모르는 채 태어나 세상 물결에 휩쓸려 어디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그렇게 죽어간다. 왜 사냐는 질문에 대답하는 이 없다. 태어난 김에 하는 수 없이 그냥 산다. 할 수 없이 산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말은 틀렸다. 이렇게 사는 건 그냥 ‘원래 지옥’이다. 살아도 지옥, 죽어도 지옥이다. 늘 괴롭다.

선을 사모하는 인간

인간의 본성은 이렇게 악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선을 사모하여 추구하기도 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알고, 인류공영에 힘쓰며, 약자를 보호하고 고귀한 뜻을 위해 희생할 줄 안다. 삶의 터전인 환경을 보호하고 영원을 추구한다.

지금은 비록 타락한 모습일지라도, 양심에 따라 도덕적으로 행동하고 영원을 갈망하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흔적과도 같다. 하지만 하나님을 잊은 인간으로선, 안타깝게도 그 노력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GPS 기능이 고장난 내비게이션을 달고 운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양면성을 가진 우리

어릴 때, 일요일 이른 아침이면 즐겨보던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이었다. 주인공이 갈등으로 괴로워하는 순간에는 늘 깃털 날개가 달린 하얀 천사와 박쥐 날개가 달린 까만 악마가 나왔다. 까만 악마는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 주인공이 내키는 대로 하라고 부추긴다. 하얀 천사는 ‘안돼 안돼’ 하면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알려준다. 때론 악마가 이길 때도 있고 천사가 이길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우리 형제들은 안타까워하고 손뼉치기도 하며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있다.

우리 안에는 늘 이런 갈등과 투쟁이 있다. 하나님을 잊고 세상 탁류에 허우적거리는 한심한 존재지만, 또한 선을 사모하는 성질도 있는 양면성을 가진 우리다. 오죽했으면 바울도 자기 안에 있는 이 기이한 모순을 탄식했을까.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15~23)

김교신 역시 그의 글 ‘영육의 선전포고‘에서 다음과 같이 이러한 양면성을 이야기했다. ‘사람은 악한 것이나, 그러나 또한 선을 사모하여 마지아니하는 성질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것을 가리켜 심리학자는 이중인격이라 한다. 이 이중인격의 발견, 혹은 각성이야말로 기독교의 입문이요 동시에 인생의 첫걸음이다. 바울은 과거 2천 년을 통털어 가장 큰 기독신자였다.’

성화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

성화는 거룩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거룩이란 세상과 구분되는 것이다. 세상 풍조는 나날이 갈리어도 내 믿음을 지키는 것이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뤄가는 것이 성화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받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의사면허나 운전면허 같은 라이센스, 자격요건에 불과하다. 얼마 전 포드 vs. 페라리를 봤다. 또 오래전 드라마 허준을 떠올려 보자. 명의가 되고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한가.

구원은 은혜지만 성화는 노력이 필요하다. 노력 정도가 아니라 전투다. 우리는 날마다 싸우는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를 거둬야 한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디모데전서 6:11~12)

그리하여 마침내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의로운 재판장 앞에 서서 면류관을 받는 날까지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푯대를 향해 달려야 한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디모데후서 4:7~8)

우리는 약하지만, 하나님은 강하시다. 내가 약할 때 강한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선한 싸움에서 내 악한 본성을 이기고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것은 내 안에 성령 하나님께서 내주하시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말자.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하자.

반갑습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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