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마태복음 18:15~17)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태복음 18:18~20)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은 과연 합심기도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일까?

우리는 흔히 ‘두 세 사람이 합심해서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는 이 구절을 붙잡고 합심기도에 힘쓰곤 한다. 사도행전에도 옥에 갇힌 베드로를 위해 성도들이 간절하게 기도하니 천사가 베드로를 풀어주는 기적이 일어났다(사도행전 12:1~19).

그렇다면 여럿이 마음을 모아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 들어주시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은 우리도 잘 안다. 합심기도의 응답에 차이가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본문에서 18절부터 20절이 정말 합심기도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읽다 보면, 17절과 이어짐이 어색하게 느껴진다. 굳이 교회에서 잘못한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는 내용 다음에 합심기도의 중요성을 말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사실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잘못한 사람을 ‘이방인이나 세리와 같이 여기고 끝내라’는 것이 아니다. 길 잃은 어린양을 끝까지 찾아내는 목자처럼 그 잘못한 사람을 위해 간구하라는 것이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마태복음 18:12~14)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잃어버린 양


잘못한 형제 바로 앞에 나오는 이야기가 바로 이 길 잃은 양에 대한 비유다. 15절의 죄 범한 형제는 정죄의 대상이 아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찾아 구해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합심해 기도하면 무엇이든 하늘에서도 풀리고 이루게 하시는 권세를 주신 것이다.

두 사람

19절에 보면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해 기도하라고 하신다. 역지사지라고 했다. 서로의 입장에서 그 마음을 헤아리고 함께 마음을 합해 기도하는 모습이다. 이기적인 마음에서 나를 돌이켜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고 그 사람을 헤아리는 것이 필요하다.

탕자의 비유

누가복음 15장(11절~32절)에는 그 유명한 탕자의 비유가 나온다. 이 이야기는 아버지가 아들을 받아준 데서 끝나지 않는다. 못마땅해하는 큰아들 이야기가 이어진다. 사실 이 부분이 메인이다.

아버지 옆에 있던 아들은 아버지 마음을 헤아려야 했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첫째도 둘째도 아버지 마음을 알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아버지 마음을 알아주는 것. 이것은 바로 성육신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이 마음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살아낼 수 없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5~8)

교회란?

‘교회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예배당이라고 답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신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모시도록 도와주는 것이어야 한다.

고백이 문제다. 마음을 담아내지 않으면 진실한 고백이라고 할 수 없다. 진심 없이 무리(떼)만 만들려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못 된다. 마음을 알아야 하고,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 사이즈만 키우는 꼴이다.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

마태복음 13장에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가 나온다. 씨를 뿌렸는데, 다음에 보니 뿌리지 않은 가라지도 함께 나온다. 주인은 지금은 그냥 놓아두라고 한다. 자칫 뽑다가 알곡이 다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주인의 마음이고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지만 우리는 때로 정죄하고 판단하고 편을 가를 때가 많다. 교회가 정죄공동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용서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신’ 예수님

마가복음 1장에는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고치신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41절을 보면,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고 한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신 분이다. 손을 대지 않아도 치료할 수 있으셨을 텐데, 어째서 굳이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셨을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의 마음을 헤아리셨기 때문이다.

문둥병은 고통이 없다. 살이 떨어져 나가도 모른다. 그들이 아픈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다. 문둥병이라 확진된 그 순간부터 격리되고 소외된 그들은 따뜻한 손길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을 아셨기에 손을 내미셨다.

고치실 수 있던 것은 능력 문제라기 보다는 그마음을 아시고 이해하셨기에, 긍휼히 여기셨기에 가능했다. 긍휼히 여기셨다는 것은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수반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다.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문둥병자10
Brooklyn Museum – The Healing of Ten Lepers – James Tissot

문둥병자 10명의 커밍아웃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셨는데, 문둥병자 10명이 멀리 서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하고 소리 높여 외치는 장면이 나온다.

이들이 돌에 맞아 죽을 것을 각오하고 이렇게 커밍아웃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평소에 들어주시고 알아주셨기 때문이다. 그분만큼은 우리 얘기를 듣고 우리 마음을 알아주실 것을 믿고 기대하고 나온 것이다.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우리는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 형제의, 이웃의 마음을 들어주고 알아주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 곧 그리스도 예수,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것이 참된 부흥이다.


이 글은 2019 상반기 말씀부흥회 첫날 설교/박충기 목사를 듣고 나름대로 정리, 요약한 글입니다. 동영상이나 음성자료가 필요한 분들은 링크된 페이지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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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 10:10)' 고백의 기쁨을 함께 누리고자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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