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로이드 존스의 십자가(1)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라디아서 6:14)

마틴 로이드 존스의 십자가(1)
마틴 로이드 존스의 십자가. A5 공책에 꼼꼼히 정리해가며 읽었다.

마틴 로이드 존스의 십자가. 6월 10일부터 어제까지 거의 열흘에 걸쳐 읽었다.

책 전체가 갈라디아서 6장 14절 말씀 한 줄을 다루고 있다. 사실 그에 대한 강해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1963년 가을, 런던 웨스트민스터 예배당에서 이 말씀을 주제로 설교했는데, 그것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A5 공책에 성경 구절도 찾아 정리해가면서 읽었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책은 총 9장으로 구성되어있다. 이번에는 각 장의 요점(이라고 생각한 부분)을 간략하게 정리해보기로 하였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다음에는 같은 저자가 쓴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을 읽어보기로 했다. 아이들에게도 권했다. 다른 친구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


제1장 놀라운 십자가

바울은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겠다고 한다. 그것밖에 자랑할 것이 없어서라고 한다. 무슨 이유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으로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그분이 죽고, 다시 승리의 부활을 하심으로 우리는 구원을 얻었다. 우리가 할 것은 이 사실을 그저 믿는 것 밖에 없다. 그것이 이유다.

구원받는 다는 것의 의미

구원받는 것이 대체 무슨 뜻인가? 마틴 로이드 존스는 다음 다섯가지로 요약한다.

  • 하나님과 화목하게 됨
  • 하나님의 자녀가 됨
  •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됨
  •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기업을 상속하게 됨

누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한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예수는 30세 까지 나사렛에서 목수로 활동했다. 그는 복음 설교가였고, 선지자 였으며, 여러가지 기적을 일으켰던 종교적 천재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그분의 진짜 모습은 베드로가 고백한 것 처럼 주님, 즉 하나님의 아들이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태복음 16:16)

예수님의 죽음은 한 평화주의자의 죽음도, 잘못 언도된 착한 젊은이의 억울한 죽음도 아니다. 변명도 못 하고 죽어간 무력했던 한 인간의 죽음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를 모욕하는 것이다. 그분은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서 죽으러 오셨다. 그러기 위해 잠깐동안 인간으로 오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0:28)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2:9)

그때,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셨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고통당하시는 동안,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셨나? 가만히 방관하시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난 다음에 ‘너희들이 내 아들에게 몹쓸 짓을 했구나. 하지만 용서하겠다.’하셨을까?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사랑하는 아들에게 덮어 씌워 우리 죄값을 대신 치르게 하셨다. 죄의 삯은 사망이고, 피흘림 없이는 죄사함이 없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계획된 일이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6)

제2장 정밀검사

우리는 정말 그리스도인인가? 그 대답의 기준은 십자가에 대한 우리 태도가 어떤가에 달려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삶을 사는가, 성령을 위해 심는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많은 사람이 십자가를 껄끄럽게 생각한다고 한다. 미련하거나 원시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조롱하고, 심지어 적대감을 표시하기도 한다. 십자가가 거리끼는 것이 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지성(知性)에 거리낀다. 여기서 지성은 선입견이나 편견이다. 유대인들은 군사적,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했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허망하게 죽어가는 메시아는 인정할 수 없었다. 헬라인은 인간의 능력을 철통같이 믿고 뽐내던 자들이다. 그들은 뭐든 다 알 수 있고 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들에게 십자가란 이해 범위나 기준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 인간의 관념, 사상에 의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선언하기에 – 십자가는 인간의 선한 생각이나 이상주의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십자가를 증오한다.
  • 윤리, 도덕에 어긋난다. 정의롭지 못하다 다른 여러 사람을 위해 한 사람이 형벌을 받아야 한다니, 정의롭지 못하다. 아들을 죽이다니 비윤리적이고 부도덕하다고 생각한다.
  • 교만 – 모든 사람의 문제가 다 여기서 출발한다. 사실 교만은 모든 고통의 원인이다. 사람들은 ‘구원하러 왔다’가 아니라 ‘잃어버린 자’로 자기들을 묘사하는 것에 분노하고 반발한다. 그것 역시 교만 아닌가. 모든 교만을 쳐부수는 것이 바로 십자가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19:10)

크리스챤이란 단지 십자가를 믿는 자가 아니라 자랑하는 자, 더 나아가 십자가만 자랑하는 자, 십자가가 모든 것이 되는 자다.

제3장 하나님의 지혜

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나? 십자가 사건은 단지 사람들이 저지른 소행이나 우연이 아니다. 이미 예언된 사건이었다. 사람들은 다만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정해진 것을 정확한 때에 실행에 옮겼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고린도전서 2:6-8)

다윗은 성령에 감동되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많은 시를 지었다. 그중에서도 시편 22편은 십자가 위에서 고통에 신음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1,2절)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6~8절)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14,15절)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16~18절)

하지만 이런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들은 알지 못한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서 온다.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지 않는한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자연,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나 신성을 조금은 알 수 있다. 여러 측면에서 하나님을 알게하는 힌트, 암시가 숨어있다. 하지만 십자가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게 하는 것은 없다.

제4장 세상을 사랑치 말라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사도행전 22:3)

바울도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자랑하던 때가 있었다. 그는 혈통, 학식, 지위, 물질 등을 고루 갖춘 사람이었다. 그는 베냐민 지파 디아스포라로 날 때부터 로마 시민이었다. 태어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 그가 태어난 다소(Tarsus)는 헬라문화의 영향이 강한 대학도시였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그는 가말리엘의 제자가 되어 공부했고, 바리새파에 속했으며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이 되었다.

정통파 유대인으로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알고 열심히 섬긴다고 자부했다. 그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핍박하는 일에 열심이었던 것은 그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길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그가 또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다메섹으로 가던 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그의 인생은 180도로 바뀌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었고,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라디아서 6:14)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이렇게 달라야 한다. 세상 것들이 감사거리는 될 지언정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게 된다. 십자가는 세상을 제거한다. 세상에서 우리를 구한다. 우리로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자랑하는 이유다.

세상이란?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살되 세상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세상이 도대체 뭔가? 세상이란 물질세계가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자세나 마음가짐을 가리킨다.

세상 풍속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나날이 바뀐다. 유행하는 패션에서부터 시대를 휩쓰는 철학까지 모두 그렇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관통하는 큰 줄기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욕망’이다. 요한1서에 이것의 특징을 아주 잘 요약한 구절이 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요한1서 2:16)

심리학에서는 욕구를 ‘어떤 것을 하고 싶어 하는 강한 충동’이라고 이야기한다. 사람은 누구나 몸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육신의 욕망을 갖고 있다. 때가 되면 먹고 마셔야 한다. 그런데 욕구의 고삐를 틀어쥐지 못하고 외려 욕망에 끌려다닐 경우가 왕왕 있다. 술과 성적 문란이 대표적인 케이스다.

세상에 어떻게 보일까 하는 안목의 정욕 문제도 있다. 하지만 외모나 허례허식은 진짜가 아니다. 결국은 남을 속이는 것이다. 이생의 자랑도 우리를 취하게 한다. 야망, 교만, 욕구는 그것을 더욱 촉진시킨다. 박수갈채 받기를 갈망하고, 중요하고 위대한 인물이 되고 싶어한다.

이런 것들 때문에 세상은 점점 무법천지가 되어가고 있다. 욕망은 시기 질투를 가져오고 결국은 싸움을 가져온다. 개인이건 국가단위건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떠난 삶이기 때문이다. 세상적 삶의 태도는 우리를 스스로 최고 절대자로 둔갑시켜버렸다.

하나님이 강조하는 것

하나님이 강조하는 것은 영혼이다. 세상이 주장하는 것과 정반대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고, 목숨을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마가복음 8:36)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19:10)

아담 이후 우리는 모두 본질상 진노의 자녀다. 주님께선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세상에서 분리하셨을 뿐 아니라, 자기에게 속하게 하시고 자신의 왕국에 들어가도록 하셨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골로새서 1:13)

우리에게 세상을 이기게 하시고 믿음을 주셨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 믿음이니라. (요한1서 5:4)

하나님께서는 진짜 세상을 보여주셨다. 그것은 참되고 순결하며 거룩한 세상, 새로운 세상이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베드로후서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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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맺는나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 10:10)' 고백의 기쁨을 함께 누리고자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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