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연과 우연 그리고 섭리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그런즉 근심으로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으로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 (전도서 11:9~10)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원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지고,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2:1~8)

솔로몬의 아가, 잠언, 전도서

솔로몬은 아가, 잠언, 전도서의 저자다. 청년기에 썼던 아가에서는 젊음의 패기와 열정, 뜨거운 믿음이 느껴지고, 노년기에 썼던 잠언과 전도서에서는 회고와 교훈이 느껴진다. 문체도 중후하다.

표현 방법에서는 잠언과 전도서가 다르다. 잠언이 직설적인 데 비해 전도서는 은유적이고 역설적이라 이해하기 어렵다. ‘할 테면 해 봐라. 하지만 허망할 뿐이다’ 하는 식이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2)’, ‘해 아래는 새것이 없나니(전도서 1:9)’라고 하는 전도서 1장은 유명하다. 10장은 부조리와 허망함의 끝이다. 하지만 전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허망함이 아니다. 해 아래의 허망함을 볼 것이 아니라, 해 위 창조주의 시각을 갖자는 것이다.

필연과 우연 그리고 섭리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전도서 3:1)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뜻대로 된다면 인간이 설 자리는 어디인가? 필연이 기계적으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 나머지는 우연인가? 우연은 뭔가?

우연은 원인 없이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사실 원인 없는 일이란 없다. 다만 그 이유가 이해범위를 벗어나 모를 뿐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 뜻에 달려있다.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심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도서 3:11)

하나님께서는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 기계적으로 돌아가도록 하지 않으셨다. 운명론에 빠질 필요가 없다. 인간은 프로그램된 대로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유, 선택의 자유를 주셨다.

선택의 자유를 주심 – 도전하라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전도서 11:1)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라고 하신다. 한번 해 보라고 하신다.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아니할 것이요, 구름을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아니하리라. (전도서 11:4)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측 가능한 일만 하려다가는 주저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굳이 하나님이 정하신 일의 시종을 미리 알려 하지 말고 믿고 가 보는 것이다. 전도도 마찬가지다. 누가 예정 받았는지 알아내 그 사람에게만 전도할 것인가.

그러나 착각하지 말라. 운이나 도박에 맡기라는 것이 아니다.

일상을 끝까지 살아내라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전도서 11:6)

어려운 시기일수록 두렵다. 전도서는 청년의 때를 만난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청년의 때는 단지 젊은이만 말하지 않는다. 청년의 때만큼 막막하고 불안할 때는 없다. 그런 마음을 가진 모든 자를 뜻한다.

섭리 – 창조자를 기억하라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전도서 12:1)

전도서 3장에 나오는 부조리한 상황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다. 그런 것만 생각하다 보면 창조주란 정말 있는 것인가 회의가 들기도 한다. ‘하나님, 정말 그 자리에 계십니까’ 부르짖으며 두려움에 잠 못 이루는 사람들도 있다. 그만큼 힘이 들고 어려울 때,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한다.

쉽게 포기하지 말자. 흔히 바둑은 어른으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한다. 어른에게 배우면 쉽사리 판을 엎을 수 없기에 끝까지 두게 되고, 그러다 보면 실력과 끈기가 자라나게 된다.

이세벨의 협박에 무너진 엘리야 는 로뎀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죽여달라고 간구했다(열왕기상 19:4). 인생에서 매일 갈멜산의 승리만 일어날 수는 없다. 죽고 싶어도 살아내야 한다. 잘하지 못해도 살아내자. 왜? 우리는 실패할 수 없는 존재기 때문이다.

효율성, 이익, 편의?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따르기보다는 내 유익을 따르곤 한다. 나와 내 아이의 불편함이나 불이익은 더더욱 참지 못한다. 세상 풍조가 그렇다. 일례로 주일예배에 참여하는 숫자가 늘어나는데, 수요예배나 다른 기도회 참석하는 인원은 줄어드는 것을 들 수 있다. 전적인 믿음, 신앙의 방향성이 상실된 시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일하실 때 효율성이나 이익, 편의를 염두에 두고 우리를 선택하셨을까. 그렇지 않다. 그랬으면 단점 많은 아브라함보다 의인 욥을 선택하셨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신명기 7:7~8)

신명기 7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것이 숫자가 많아서가 아니다. 너희는 오히려 가장 적다고 하신다. 적다는 것은 단순히 숫자가 적음 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행동이나 태도도 한심한 수준이란 의미도 내포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셨기에 전부를 걸고 선택했고, 끝까지 함께 하시고 사랑하신다. 우리는 始終을 모르나, 하나님을 알기에 끝까지 하나님을 따라간다. 이것이 전도서 기자가 하려는 말이다.


필연과 우연 그리고 섭리. 이 글은 2019 상반기 말씀부흥회/강사 박충기 목사 둘째날 설교를 듣고 나름대로 정리, 요약한 글입니다. 동영상 자료가 필요하신 분들은 링크된 페이지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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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맺는나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 10:10)' 고백의 기쁨을 함께 누리고자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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