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13장 웃사는 왜 죽었을까?

역대상 13장 웃사는 왜 죽었을까? / 역대상 13장을 보면, 수레에서 떨어지려는 법궤를 붙잡은 웃사가 죽는 장면이 나온다. 수레에서 떨어지는 것을 막았으면 잘한 일 아닌가? 웃사는 왜 죽었을까?

역대상 13장 웃사는 왜 죽었을까?
역대상 13장 웃사는 왜 죽었을까?

역대상 13장 웃사는 왜 죽었을까?

  •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옮겨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매
  • 뭇 백성이 이 일을 선히 여기므로 온 회중이 그대로 행하겠다 한지라
  • 이에 다윗이 애굽의 시홀 시내에서부터 하맛 어귀까지 온 이스라엘을 불러 모으고 기럇여아림에서부터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고자 할쌔
  •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바알라 곧 유다에 속한 기럇여아림에 올라가서 여호와 하나님의 궤를 메어오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두 그룹 사이에 계시므로 그 이름으로 일컫는 궤라
  •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웃사와 아히오는 수레를 몰며
  •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주악하니라
  • 기돈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더니
  •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웃사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역대상 13:3-10)

1. 블레셋에 빼앗긴 법궤

블레셋과의 싸움이 불리해지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법궤를 마치 부적처럼 여겼다. 그들은 실로에 있던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왔다. 그러나 전쟁에서도 지고, 법궤는 빼앗기고 말았다.

법궤는 블레셋의 다곤 신전에 있다가 일곱 달 만에 기럇여아림으로 옮겨졌다. 계속되는 환난에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92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동안 사울이 왕이 되었다가 또 죽었다. 왕이 된 다윗은 7년 6개월 만에 블레셋을 이기고 예루살렘으로 천도했다.

2. 옮겨지는 법궤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은 기럇여아림 아비나답의 집에서 법궤를 다시 옮겨오기로 했다.

이제 문제의 장면이 벌어졌다. 웃사와 아히오가 모든 새 수레에 법궤를 싣고 오던 중, 수레를 끌던 소들이 뛰자 궤를 붙잡은 웃사가 궤 곁에서 죽어버린 것이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웃사를 치셨다, 충돌하셨다’고 묘사된다. 궤가 떨어질 뻔한 걸 막았으면 잘한 것 아닌가. 웃사는 왜 죽은 걸까?

3. 메지 않고 수레에 실었다

원래는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고 했지만(5절), 어떻게 된 일인지 7절에 보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나왔다. 출애굽기 37장에 나온 것처럼 법궤는 하나님 말씀에 따라 메도록 만들었다. 민수기에서도 ‘고핫 자손들이 어깨에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민수기 4:5)고 하셨다.

광야 생활 40년간 백성들은 법궤를 메고 다녔다. 메지 않고 수레에 실은 것은 이번 말고는 블레셋이 법궤를 탈취해가는 장면밖에 없다.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사무엘)상 6:8). 언약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인들이나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4. 시각의 문제

궤를 메든 싣는 무엇이 문제인가. 첫째, 하나님 말씀을 어긴 것이 문제다. 둘째, 법궤를 단순히 물건으로만 여긴 ‘시각’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 법궤 위를 덮은 속죄소는 하나님께서 임하셔서 은혜를 베푸시는 자리다. 거기 임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함부로 할 수 없다.

3, 5, 6, 7절에는 ‘하나님의 궤’라고 나오던 것이 10절에는 ‘궤’라고만 나온다. 이것은 웃사의 시각을 반영한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그가 죽은 것은 그저 ‘궤’ 앞이 아니라 ‘거기 하나님 앞’이었다(10절).

영어 성경을 보면 ‘메다’를 ‘bring’으로, ‘싣다’는 ‘carry’로 번역하고 있다. bring과 carry의 차이는 무엇인가. bring은 사람과 물건 양쪽에 다 쓸 수 있지만, carry는 그럴 수 없다. 물건에만 쓸 수 있는 말이다. 법궤를 어떤 눈으로 보았는지 그 차이가 드러난다.

5. 관계의 문제

하나님과 우리는 인격적 관계다. 이것이 뒤틀리면 비인격적 관계로 변한다. 관계가 올바로 유지되려면 조심스러움과 친밀함이 함께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에서 이런 관계를 함축적으로 알려주셨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늘에 계신 경외의 대상인 동시에 친밀하기 그지없는 우리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심을 말이다.

이 인격적 관계가 무너지면 헌금이 세금이 되고, 하나님을 우상 취급하게 된다. 하나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것은 우상 취급하지 말라는 뜻이다.

우상이 무엇인가. 말도 못 하고 걸어다니지도 못 한다. 하나님을 우상 취급하는 것은 우상처럼 가만히 있으면서 방해하지 말고 그저 복이나 내려 달라는 것 아닌가.

죽어야 할 감각은 예민해져서 늘 염려에 시달리고, 예민해야 할 영적 감각은 무뎌져 하나님께 대해서는 둔감해졌다. 신앙과 삶이 변하고 관계가 회복되길 기도하자. 하나님 얼굴을 바라고 말씀에 충실하자.


이 글은 2023. 2. 19. 내수동 교회 주일예배 설교 ‘수레로 모신 하나님, 마음으로 모신 하나님‘을 듣고 나름대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설교 본문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