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심하여 포기하고 싶을 때 (누가복음 18:1~8) / 이번 주부터 목사님 안식월이라 외부에서 초빙되어 오신 분이 설교하시게 되었다. 그래서라고 하면 이상하지만, 어쨌든 어제는 오후 대학부 예배를 드렸다. 누가복음 18장 1절부터 8절 말씀을 중심으로 한 설교였다. 인상 깊었던 부분을 정리해 보았다.

낙심하여 포기하고 싶을 때 (누가복음 18:1~8)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누가복음 18:1~8)
1.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
어떤 도시에 한 과부가 있었다. 어떤 문제로 그는 재판관을 자꾸 찾아가 원한을 풀어달라고 했다. 당시 여자는 재판에서 증거능력도 없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자기를 대리할 남편이 없는 과부의 처지는 더욱 딱했을 것이다.
멀쩡한 재판관을 만나도 힘들었을 상황에서, 하필 그 과부가 만난 재판관은 나쁜 재판관이었다.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은 무시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처음에 과부를 상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과부가 자꾸 자기를 찾아오자 마음이 바뀌기 시작했다.
5절에 ‘번거롭게하다(코포스)’는 말은 단순히 성가시게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일 때문에 다른 정상적인 업무에 전념할 수 없게 타격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괴롭게 하다(휘포피아조)’는 회포(아래)와 화스(눈)가 합쳐진 말로, ‘눈 밑을 때려 멍들게 하다’라는 의미다. 즉 얼굴에 먹칠을 당하다 정도의 표현이 되겠다(호크마 주석).
불의한 재판관은 창피를 당할까 겁나 바른 재판을 통해 과부의 정당한 권리를 찾아주고자 마음먹게 된 것이다.
2. 어쩌다 나온 비유인가?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과부가 했던 것처럼 기도로 하나님을 들들 볶으면 들어주실 거란 말씀인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오해다. 바른 뜻을 찾으려면, 이 비유가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종말의 때
이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들으신 것은 바로 인자의 때, 바로 종말을 설명하시기 위함이었다. 17장 20절에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의 연장이었다.
마지막 때의 특징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누가복음 17:26-30)
노아나 롯의 때처럼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지었다고 하셨다. 여기 나쁜 구석이 있는가. 없다. 살려면 해야 하는 일상 활동이다. 하지만 이것이 최종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내 직장, 내 경력, 내 돈, 내 계획, 내 감정, 내 만족, 내 이성…. 모든 것의 기준이 ‘나’다. 모든 관심이 내게 집중된다. 대신 말씀과 이웃에는 무관심하다. 가장 큰 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빠진 이것이 종말의 때의 특징이다.
진짜 의미
이 비유의 의미는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실 때까지 하나님을 설득하라는 교훈을 주려는 게 아니다. 진짜 목적은 1절에 나온 것처럼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는 것에 있다.
3.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
예수님께서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태복음 7:7),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마가복음 11:24)고 하셨다. 그러나 모든 응답이 즉각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늘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려면 인내해야 한다.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인내의 문제는 시선의 문제다. 무엇을 바라보는가.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봤을 때는 물 위를 걸었지만, 풍랑 이는 물결을 보고는 빠져버렸다. 주님을 바라볼 때 희망이 있지만 문제를 바라보면 낙망하기 마련이다.
4. 믿음을 보겠느냐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다.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누가복음 8:50)고 하셨는데, 말세에는 믿음을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21)고도 하셨다.
믿음과 행위는 따로 가지 않는다. 믿으면 변한다. 사람이 변하고 행실이 변한다. 나라는 종자가 변하기 때문이다. 내가 기를 쓰고 변하려 애쓰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변화시키신다. 변화의 폭이 크냐 작으냐, 남의 눈에 띄냐 아니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남의 눈에 띄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은 알아주신다.
믿음은 변화의 시작이자 동력이다. 믿음은 인내하게 하고, 기도를 계속하게 한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옳으심을 믿고,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설득당하는 믿음. 하나님께서는 이런 믿음을 찾고 계신다.
집에 와서도 계속 ‘기도는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설득당하는 것‘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그동안 기도에 열심을 낸다고 했던 것들이 사실은 기도가 아니라 그저 ‘치성’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말도 새롭게 여겨졌다. 작년부터 정말 기도할 일이 많이 생겼다. 기도하는 중에도 계속 자책과 무력감에 시달렸고, 잠을 이루지 못해 괴로운 적도 많았다.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은 내려놓아야 하는데, 그저 끌어안고 낑낑대며 괴로워했다.
이제 보니, 풍랑으로 물결치는 바다만 바라보며 그저 그 안으로 빠져드는 형국이었다. 베드로도 그랬다. 다행히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자야’ 하지 않으시고 ‘믿음이 적은 자여’라고 하신다.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마치 내게 하시는 말씀 같아 위로받고 용기를 내게 되었다. 낙심하여 포기하고 싶을 때, 눈을 들어 주님을 보자.
어젯밤. 바다에서 눈을 돌려 예수님을 바라보는 데 성공했다. 평안 중에 달게 자고 일어날 수 있었다.
설교 내용을 그대로 정리한 것이 아니라 설교 본문과 차이가 있습니다. 아래에 설교 동영상을 첨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