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세례 장면에서 그동안 놓쳐온 2가지

마태복음 3장 13절에서 17절은 주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이다. 지난 몇 주 동안 목사님은 이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했는데, 그동안 미처 모른 채 놓치고 있었던 것을 새로 발견할 수 있었다.

주님의 세례 장면에서 그동안 놓쳐온 2가지

주님의 세례 장면에서 그동안 놓쳐온 2가지
세례요한에게 세례받으시는 예수님, 천정 모자이크, 네온 세례당, 라벤나 CC BY-SA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3:13~17)

이방인, 죄인의 자리에 서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 피를 흘리셨으며 사망을 이기시고 다시 사신 것을 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십자가 위에서의 일이었다. 그런데 죄인의 자리에 서신 것은 비단 십자가에서만이 아니었다. 세례의 자리 역시 아무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스스로 죄인이라고 선언하신 것과 다름없는 자리였다.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마태복음 3:7~8)

신약 시대, 세례는 이방인을 위한 것이었다.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 세례를 받았다. 유대인은 이미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세례가 필요 없었다. 하지만 많은 유대인이 세례 요한에게 와서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스스로 본질상 이방인과 다름없는 아무 소망 없는 죄인이라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에베소서 2:3)’라는 말씀이 연상된다.

그런데, 예수님까지 세례를 받기 위해 나아오셨다. 아무 죄도 없으신 분이 이방인, 죄인의 자리에 서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죄인의 자리에 서신 것은 십자가 위에서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것부터 죄인의 자리에 서기 위한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예수님께서는 진정 죽기 위해 오셨고, 또 이기기 위해 오셨다.

요한은 당치 않다. 오히려 자기가가 주께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렸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제 허락하라’고 하셨다. 여기서 ‘이제 허락하라’는 말은 요한에게 허락을 구하는 말이 아니다. ‘(요한 네 말이 맞지만)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는 뜻이다(현대어성경).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세례를 받겠다고 하신 것일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서’(to fulfil all righteousness)였다. 의 義가 무엇인가. 올바른 것,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한다. 무엇이 올바른 것이고 지켜야 할 것인가. 더 나아가 올바름의 기준은 무엇인가. 사람들의 합의에 의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사람의 가치 기준은 모두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항상 옳은 것은 하나님 밖에 없다. 세상을 지으신 이가 그 세상의 기준이 되지 않으면 누가 기준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이 만든 어떤 기계나 프로그램도 그걸 만든 사람의 뜻에서 벗어난 것은 그저 고장난 out of order 것 에 불과하다.

의, 올바름의 기준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뜻이 바로 올바른 것이다. 하나님께서 옳다 하면 옳은 것이고 그르다 하면 그른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부터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지 않은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내가 죽지 않으면 순종할 수 없다. 바울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다(고린도전서 15:31).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심으로 순종함을 보이셨다.

하늘이 열리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다 이루었다’고 하셨을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 그야말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던 막힌 담을 허셨다(에베소서 2:14).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예수님께 임했다.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도 들렸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순종으로 인하여 하늘이 열리게 되었다. 물론 이때 하늘이 열리거나 성령이 내려온 것은 우리 모두가 아니라 예수님께 해당하는 것이었다. 믿음의 백성이 하나님과 화평하게 된 것은 십자가 사건 이후였고, 성령이 오신 것은 예수님의 승천 후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였다.

이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것 역시 아무것도 없다. 모든 고통은 하늘과 땅의 단절에서 비롯된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은 그저 고통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망에 까지 이르게 한다. 그러나 이제 사망의 이기는 것도 없고 쏘는 것도 없게 되었다(고린도전서 15:55). 단절된 관계에서 열린 관계로 바뀐 것이 해방이다. 예수님께서는 포로 된 자,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오셨다.

우리는 하늘의 열린 문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 어디인가.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다(시편 139:8). 하나님은 천지에 충만하시다(예레미야 23:24).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하나님 나라다. 하나님 나라에선 왕이신 하나님의 뜻이 이뤄진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스려 주십시오’와 같은 뜻이다. 그러기에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뤄지는 것’이다. 매일매일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것처럼 매일매일 하나님이 다스려 주시는 나라, 하나님 뜻이 이뤄지는 나라, 천국과 이 땅이 하나되는 그런 나라가 바로 우리가 소망하는 나라다. 그런 감격스러운 순간이 곧 오길 고대한다.

이 글은 2024. 2. 25. 내수동교회 주일예배 설교를 듣고 적은 글입니다. 설교 본문과 일치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