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은 죽어 무지개다리를 건넌다는데

사랑으로 키우던 동물이 죽었을 때, 흔히 ‘무지개다리를 건넜다’고 표현한다. 이 무지개다리를 건너서 고양이는 고양이 별에, 강아지는 강아지 별에 간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건 누구나 다 알지만,그렇게 서로를 위로하는 것이다.

무지개다리 1
무지개다리@위키미디어

무지개다리라는 말의 유래

그런데, 무지개다리를 건넌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대략 20년 정도 되었을까? 이런 동화적인 표현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인터넷 세상을 검색해 보면, 1980년대, 미국의 어떤 시인이 쓴 Rainbow Bridge라는 시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 시는, 사랑하는 동물이 무지개 다리를 건너 고통 없는 곳에서 주인을 기다린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시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Just this side of heaven is a place called Rainbow Bridge.

When an animal dies that has been especially close to someone here, that pet goes to Rainbow Bridge.

There are meadows and hills for all of our special friends so they can run and play together.

There is plenty of food, water and sunshine, and our friends are warm and comfortable.

All the animals who had been ill and old are restored to health and vigor; those who were hurt or maimed are made whole and strong again, just as we remember them in our dreams of days and times gone by.

The animals are happy and content, except for one small thing; they each miss someone very special to them, who had to be left behind.

They all run and play together, but the day comes when one suddenly stops and looks into the distance. His bright eyes are intent; His eager body begins to quiver.

Suddenly he begins to run from the group, flying over the green grass, his legs carrying him faster and faster.

You have been spotted, and when you and your special friend finally meet, you cling together in joyous reunion, never to be parted again.

The happy kisses rain upon your face; your hands again caress the beloved head, and you look once more into the trusting eyes of your pet, so long gone from your life but never absent from your heart.

Then you cross Rainbow Bridge together….

천국 바로 이쪽에는 무지개 다리(Rainbow Bridge)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누군가와 특별히 친하게 지냈던 동물이 죽으면 그 애완동물은 무지개다리로 갑니다.

우리의 특별한 친구들을 위한 초원과 언덕이 있어 함께 달리고 놀 수 있습니다.

음식과 물, 햇빛이 풍부하고 우리 친구들은 따뜻하고 편안합니다.

병들고 늙어가던 모든 동물들이 건강과 활력을 회복합니다. 다치거나 불구가 된 사람들은 지나간 날과 시대의 꿈 속에서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는 것처럼 다시 온전해지고 강해집니다.

동물들은 한 가지 작은 일을 제외하고는 행복하고 만족합니다. 그들 각자는 그들에게 남겨져야만 했던 매우 특별한 누군가를 그리워합니다.

모두 함께 달리고 놀다가 문득 멈춰서 먼 곳을 바라보는 날이 온다. 그의 밝은 눈은 의도적입니다. 그의 열망하는 몸이 떨리기 시작한다.

갑자기 그는 푸른 잔디 위로 날아가며 무리에서 뛰기 시작했고, 그의 다리는 그를 점점 더 빠르게 운반했습니다.

당신은 목격되었고, 당신과 당신의 특별한 친구가 마침내 만났을 때, 당신은 다시는 헤어지지 않고 즐거운 재회를 하게 됩니다.

당신의 얼굴에 행복한 키스가 쏟아집니다. 당신의 손은 다시 사랑하는 머리를 어루만지고, 당신은 오랫동안 당신의 삶에서 사라졌지만 결코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던 애완동물의 신뢰하는 눈을 다시 한 번 바라봅니다.

그럼 같이 무지개다리를 건너요….

천국에서의 재회: 반려동물과의 만남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반려동물과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궁금해한다. 그렇게 궁금해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조금이라도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누가 여기 답을 내려줄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우리가 키우던 동물을 천국에 가서 다시 만날 수 없다고 단정한다. 하지만 그 반대로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가만히 들어보면 ‘동물도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먼저 동물은 영혼이 없다고 주장한 사람 중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데카르트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동물은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없고, 감정도 없는 자동인형 같은 존재, 영혼이 없는 존재라고 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키워본 사람은 알겠지만, 동물 역시 생각이란 걸 하고, 희로애락을 느낀다. 심지어는 꿈도 꾸고 잠꼬대도 한다. 어떨 때에는 주인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모습까지 보인다. 때론 인간도 하기 어려운 헌신을 하기도 한다.

성경에 기록된 동물의 영혼

그렇다면 성경에는 동물의 영혼에 대해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 전도서를 보면 동물에도 영혼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생의 (the spirit of man)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the spirit of the beast)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전도서 3장 21절)”

이 구절을 히브리 원문으로 보면, 여기서 혼은 ר֚וּחַ (루아흐)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바람, 숨이라는 뜻이다.

동물도 구원 대상인가?

먼저 로마서 8장 21절을 보자.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고 되어 있다. 창조 질서의 회복은 모든 피조물, 전 우주를 대상으로 한다. 동물 역시 여기 포함된다.

무지개다리 2
어린양과 사자 그림이 있는 간판, 영국 @위키미디어

이사야서를 보면, 각종 동물이 먹이 사슬에서 벗어나 화목하게 지내는 이상적인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거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이사야 11:6~10).”

하지만 그런 피조물들에 대한 회복은 인간의 구원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뤄진다. 욥기 마지막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다. 욥은 잃었던 가축을 곱절로 받지만, 자녀들은 곱절이 아닌 동일한 수로 받는다. 이것은 먼저 천국에 간 욥의 자녀들을 반영한 결과다.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 하게 하시니, 그가 양 14,000과 약대 6,000과 소 1,000 겨리와 암나귀 1,000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 (욥기42장 10절~13절)

동물, 범위를 더 넓혀 모든 세상이 예수님께서 대속하신 구원의 대상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은 몇가지 질문으로 유추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는 자녀, 하나님과 동행하는 친구는 누구인가? 예수님께서 대신 피흘리고 죽기까지 하신 것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나는 자문해 본다. ‘나는 누굴 대신해 죽을 수 있을까?’ 내 자녀를 위해서라도 냉큼 그렇다고 답하긴 어려웠다. 그렇다면 집에서 키우던 뽀삐나 나비, 앵무를 위해서는? 아니오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해 죽으셨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분명히 적혀있다. 하지만 동물을 위해 죽으셨다는 말씀은 찾아볼 수 없다.

이로 미루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1. 대속사역을 통한 구원의 대상은 인간이다. 2. 피조 세계는 창조질서 회복의 대상이지 구원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 집 뽀삐도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나요?’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반려동물은 영혼이 없어 천국에 갈 수 없고,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대답에 연약한 영혼은 상처받는다. 상처 주지 않기 위해 무조건 긍정적인 답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성경에 기록된 만큼만 답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동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귀한 존재다. 데카르트처럼 그저 정교한 기계라 여겨서도 곤란하겠지만, 그렇다고 동물신학자처럼 생각하는 것도 곤란하다. 사실 일상에서 더 큰 문제는 집에서 키우는 동물에 심적으로 깊이 의존하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지는 데 있다.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이 외로워한다. 일인가구가 늘어나는 것도 여기 한몫을 한다. 일인가구라면 언뜻 객지에서 올라온 학생이나 독립한 젊은이를 생각하게 되지만,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노인들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고독하지 않게 챙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외면해서도 안 되지 않겠는가. 개인이 어려우면 교회에서도 나서야 한다. 많은 교회가 그렇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성경은 창조 질서의 회복은 모든 피조물, 전 우주를 대상으로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물 역시 여기 포함된다. 천국에는 귀엽고 멋진 동물들이 많겠지만, 그중에 우리가 키우던 아이들을 그때 모습 그대로 만날 것이라 장담할 수는 없다. 믿는 사람들은 세상의 철학자들처럼 말하면 안 된다. 우리는 성경보다 앞서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앞서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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