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불렀을까?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소경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무리의 지남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저희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 하니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저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누가복음 18:35~39)
여리고
여리고는 요단강 서쪽,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약 27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대 도시로, 여호수아가 정복한 첫 번째 가나안 도시였다. 비옥한 오아시스 지역에 위치해 있어 ‘종려나무의 도시’라고도 불린 이곳은 향료 무역의 거점으로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중요한 도시였다. 예수님 시대에 여리고는 헤롯왕이 겨울 궁전을 지은 곳이기도 헸다.

바디매오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여리고를 꼭 거쳐야 했기에, 많은 사람들이 몰릴 수밖에 없었다. 사람 많은 곳엔 소매치기나 거지들도 몰리기 마련이다. 그중에는 날 때부터 맹인인 바디매오도 껴 구걸하고 있었다. 여리고는 부유하고 아름다운 도시였으나, 그는 맹인이었기에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분위기가 다른게 느껴졌다. 시끌벅적하던 곳이 더 소란스러워졌다. 앞이 보이지 않는 바디매오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대답했다.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
예수
당시 ‘예수’는 아주 흔한 이름이었다. 신명기 뒤에 나오는 여호수아도 실은 예수와 같은 이름이다. 같은 이름을 히브리식으로 부르면 여호수아, 헬라어식으로 발음하면 예수스, 예수가 되는 것이다. 또, 사해 근처에 남은 1세기 한 재판 기록을 보면, 어떤 여자의 남편, 시아버지, 아들이름이 모두 예수였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글에는 20명의 예수가 등장하며, 그중 저자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예수는 10명이나 되었다(재미있는 성경상식/그 흔한 이름 예수, 그 귀한 이름 예수, 한국일보, 2020.3.27.).
당시에는 성姓도 없었던데다 흔한 이름이기도 했기에 이름 앞에 출신지를 붙여 구별했다. 다행히 나사렛에서 온 예수는 예수님 한 분밖에 안 계셨나 보다.
그랬다.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그저 나사렛이란 촌 동네에서 온 청년에 불과했다.
갈릴리 나사렛
나사렛이란 어떤 고을이었나. 그곳은 이스라엘 북부, 갈릴리 지방의 작은 마을로, 구약성경에서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는 곳이었다. 나다니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한복음 1장 46절)’고 했던 걸로 보아 평판이 좋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나사렛이 400명 정도가 모여 사는 가난한 농촌 마을이긴 했지만, 단순히 그것이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는 것 같은 평가를 받는 이유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슨 까닭에 그 작은 고장은 그런 평가를 받았을까?
그것은 나사렛, 더 나아가 갈릴리 지역의 지리, 역사, 문화, 종교적 여건 때문이었다.
나사렛이 속한 갈릴리는 이스라엘 북부에 있는 지역이었다.
갈릴리 지역
갈릴리는 이스라엘의 북부 지역으로, 예수님의 주요 사역지였다. 이 지역은 비옥한 토지와 아름다운 자연 경관으로 유명했는데, 이곳 사람들은 주로 농사를 짓거나 고기를 잡아 근근이 살아갔다. 갈릴리에는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도 많이 섞여 살았기 때문에 문화는 물론, 종교마저 달랐다.
그렇게 된 것은 첫째, 반란을 일으켜 북이스라엘을 분리시킨 여로보암이 권좌를 지키기 위해 이상한 종교 정책을 썼기 때문이다. 성전은 오직 한 곳 예루살렘에만 있었다. 그곳으로 가서 예배를 드리다 보면 사람들은 당연히 정통성을 의심하게 될 터였다. 따라서 그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는 것을 막고자 벧엘과 단에 제단을 쌓고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도록 했다. 자기만 배교한 것이 아니라, 온 백성을 죄의 길로 이끌었다.
둘째,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가 혼혈정책을 썼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과 혼인하는 것을 철저히 금하셨다. 그것은 다른 신을 섬기게 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었다(신명기 7장 1~4). 하지만 혼혈정책으로 갈릴리를 비롯한 북이스라엘 지역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한 유대 지역과는 문화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큰 차이가 있게 되었다. 유대 사람들은 북 이스라엘 사람들을 거의 모든 면에 있어서 순수하지 못하다 여기고 교제하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많은 시간을 피해 뜨거운 한낮에 물을 길러 나왔던 사마리아 여자를 생각하면 쉽게 알 수 있다(요한복음 4장 5~9절).
그런데 예수님께선 이 갈릴리 지역에서 성장하셨고, 대부분의 사역을 펼치셨다. 또한 제자들도 대부분 이 지역 출신이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이 종교적 엘리트나 권력자들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과 제자들까지 갈릴리 지역으로 묶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걸 당연하다 여겼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하지만 바디매오는 ‘갈릴리 예수여!’라고 부르는 대신,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부르짖었다. 그에게 예수는 갈릴리 촌구석에서 올라온 알 수 없는 청년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 예수였다.
우리는 다윗의 자손 예수라는 말이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하다. 그래서 그 구절이 주는 충격을 전혀 느낄 수 없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에겐 어땠을까? 몹시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다윗의 후손이라는 의미
정말 문자적으로 다윗의 후손이라는 의미다.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2장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나와 있다. 예수님은 법적으로 요셉을 통한 다윗의 후손이며, 마리아를 통해 다윗의 혈통을 이어받은 명실상부한 다윗의 후손이다.
그렇다면 다윗의 후손은 예수님 혼자인가? 그렇지 않다. 육적인 다윗의 후손은 정말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 태어난 예수님의 형제만 해도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같은 남동생 넷과 여동생 둘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바리새 사람들은 왜 다윗의 자손 예수라는 말에 그렇게 치를 떨었던 것인가.
메시아라는 의미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에는 메시아, 그리스도라는 뜻이 있기 때문이었다. 메시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보내기로 약속한 사람을 가리키는 히브리어다. 그리스도 역시 같은 뜻으로, 이는 메시아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다.
사무엘하 7장에 보면 그에 관한 나단의 예언이 나온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사무엘하 7장 12~16절)
또 이사야 11장에도 다윗의 자손 중에 구세주가 나신다는 예언이 나온다.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이사야 11:10)
그런 까닭에 랍비들도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제 입으로 시인한 바 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마태복음 22장 424절)
하지만 그들은 성령에 감동된 다윗이 자기 자손인 그리스도를 주라 일컬은 데 대해선 답을 하지 못했다. 마태복음 22장 43, 44절에 인용된 구절은 시편 110편 1절 말씀이다. 바리새인들은 다윗의 자손이면서 동시에 다윗의 주님이 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시편 110:1)
그들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에만 관심이 있었다. 바리새인들, 랍비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이스라엘은 독립하고 유대인이 세상을 지배하고, 다른 모든 민족은 하층 피지배계급이 되는 세상이 온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정치지도자로 가르쳤기에, 제자들마저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이니이까?(사도행전 1장 6절)’이라고 물었다.
성경에 해박했던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에서 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자기가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엔 신성모독이라며 경기를 일으켰다. 결국 그들은 없는 죄를 덮어씌워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았다. 정말 눈으로 봐도 보지 못하고, 귀로 들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에 비해 무식하기 짝이 없던 거지 바디매오나 두 맹인, 그리고 가나안 여인은 자기를 구해줄 것을 기대하며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예수님을 단지 나사렛에서 온 청년이 아니라 그럴만한 힘을 가진 분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가실쌔 두 소경이 따라 오며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마태복음 9장 27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마태복음 15:22)
맺음말
다윗이 시편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해 고백한 것은 성령에 감동되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아무 배움 없는 자들도 하는 고백을 바리새인들만 하지 못하고 오히려 귀를 막은 것은 성령과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많이 배웠다고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은혜가 아니면 믿을 수 없다. 당장 믿지 못했다가도 오랜 세월이 지나 비로소 믿게 된 분들도 많이 보았다. 그런 우리는 모두 은혜받은 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