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주 예수님께선 왜 사람이 되셨는가
지난 주일 설교는 ‘창조주 예수님께선 왜 사람이 되셨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설교를 통해 너무나 익숙했던 것들을 다시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다.

성전을 떠나신 하나님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의 행하는 일을 보느냐 그들이 여기서 크게 가증한 일을 행하여 나로 내 성소를 멀리 떠나게 하느니라 너는 다시 다른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 (에스겔 8장 6절)
에스겔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족속의 가증한 죄 때문에 성소를 떠난다고 하셨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에 끌려가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으니 가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제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더라도 하나님이 안 계시니 만날 수도 없고 예배를 드릴 수도 없게 되어 버렸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벨론이 침략했을 때도 예루살렘이 무너질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예루살렘에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성전을 일종의 단순한 부적처럼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들이 성전에서 행한 ‘가증한 일’ 과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을 동시에 생각할 수 없다. 에스겔이 목격한 가증한 일은 다음과 같다.
- 성전 안뜰로 들어가는 북쪽 문에는 투기를 격발케 하는 우상이 있었다.
- 성전 뜰 안에는 벽 사면에 각양 곤충, 가증한 짐승,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우상들이 그려진 방이 있었다.
-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 70명이 향로를 들고 거기 서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분향하고 있었다.
- 북문에선 여인들이 담무스를 위해 애곡하고 있었다.
- 성전 안뜰, 현관과 번제단 사이에선 25명의 사람이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동방 태양을 향해 경배하고 있었다.
성전 안뜰(담이 쳐져 일반 백성이 들어가거나 볼 수 없는 제사장의 뜰)에는 우상이 세워져 있었다. 이스라엘 장로들은 하나님의 성전 안쪽에 은밀한 방을 만들어 두고 거기서 몰래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다.
담무스는 수메르, 바벨론, 페니키아 등 에서 섬기던 우상으로 애굽의 오시리스, 그리스의 아도니스에 해당한다. 근동 지역에는 하천이 마르고 식물이 시드는 여름이 오면, 지하 세계로 내려간 담무스의 죽음을 애도했다. 우상숭배는 일반 여자들에게까지 깊숙이 침투된 데다, 버젓이 성전까지 와서 할 정도로 만연화되었던 걸로 보인다.
현관과 번제단 사이는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거룩한 곳이다. 그런데 거기서 제사장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 태양신에게 경배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성회와 악을 아울러 행함을 견디지 못하시는 분이다. 에스겔 10장에는 하나님께서 성전을 떠나시는 장면이 나온다.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 어디에나 충만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지은 한낱 성막이나 성전 안에만 계시겠는가. 솔로몬도 성전을 봉헌할 때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하고 기도했다(열왕기상 8장 27절).
하지만 그 후손들은 하나님을 무시했다. 그저 힘없는 우상 중의 하나로 취급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고 가증한 짓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했다. 하나님께선 그곳을 떠나셨다.
친히 성소가 되어주신 하나님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고 열방에 흩었으나 그들이 이른 열방에서 내가 잠간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에스겔 11장 16절)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긍휼하시다. 이스라엘 백성을 그냥 외면하지 않으셨다. 포로가 되어 열방에 흩어진 그들에겐 이제 성막도 성전도 없다. 그런 그들 가운데 친히 성소가 되겠다고 하신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어 보호하시고 다스려주시겠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잠간’이란 말씀은 포로 생활이 영원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
자, 이제 ‘창조주 예수님께선 왜 사람이 되셨는가’하는 문제로 돌아가자. 한마디로 우리를 그냥 내버려둘 수 없어서 오셨다. 구원을 위해, 대속을 위해 오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
예수님께서는 33세의 청년으로 죽기까지 동고동락하셨다. 그야말로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셨다. 인간으로 오셨기에 몸소 간고를 겪으셨고, 또 우리의 질고를 아신다(이사야 53장 3절). 세상에 어느 누가 예수님보다 더 큰 고통과 고난을 겪었다 할 수 있을까.
100% 하나님이면서 100% 인간인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시면 누가 우리를 위해 대신 죽고 값을 치루며 구원하실 수 있단 말인가. 아무도 없다. 오직 예수뿐이다.
예수님께선 성육신을 통해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 되셨다(요한복음 2장 21절). 이젠 잠간이 아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인 새 예루살렘에서도 성전이 되신다(요한계시록 21장 22절). 영원토록.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요한계시록 21장 22절)
이 글은 2024. 11. 10. 내수동 교회 주일설교 ‘예수(4)-창조주‘를 듣고 생각을 정리한 글입니다. 설교 본문과 글의 내용은 일치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