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는 세상 끝의 징조를 묻는 제자들에게 노아의 때, 롯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하셨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는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7:26~29)
노아의 때와 롯의 때 시류에 휩쓸리지 말자

노아의 때와 롯의 때가 어떤 모습이었나. 인용된 구절로 보면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 오히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선 꼭 해야 하는 일이다. 착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상관없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사는데 바쁜게 문제다. 먹고사는 일상에 매몰되고 휩쓸려 내가 누군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이 문제다. 한마디로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게 문제다. 인생이라는 나그넷길에서 기억상실증 환자가 되어 거센 탁류에 휩쓸려 떠내려가 그대로 비참하게 생을 마칠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를 그냥 놔두지 않는다. 갖가지 방법으로 우리 약점을 파고들어 유혹한다. 때론 개인을, 또 때론 집단을 공격하기도 한다.
주인 의식을 갖고 살아라
가장 흔히 듣게되는 말이다. 인생의 주인은 나다. 주인의식을 갖고 살아라. 나를 믿어라. 언뜻 들으면 모두 맞는 말이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다.
우리의 주인이 누구인가. 우리를 지으신 이가 누구인가. 우리는 우리 인생의 주인이 아니다. 생사여탈권을 가진 이가 누구인가. 이 세상에 온 것도 내 맘대로 온 것이 아니고, 가는 것도 내 마음이 아니다. 오고 가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면서 무슨 주인이고 할 수 있나.
내면을 들여다 보라
잠잠하라. 내면을 들여다봐라.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라. 침잠하라. 무의식과 만나라. 이것 역시 많이 듣는 소리다. 차분히 앉아 마음을 비우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명상이다. 좋아 보인다.
그렇게 내면을 향한 시선이 결국 다다르는 곳은 어디인가. 불완전한 존재, 죄성이 있어 갈등하는 존재의 찌끼가 가득한 곳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의식의 하부로 내려가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 말한다(pp.188~189).
세상을 흑백논리로 살지 말아라
내가 10대 때, 이런 어른들의 말을 듣곤 했다. “세상은 그렇게 흑과 백으로 딱 나뉘는 게 아니다. 흑백논리로 세상을 살면 안 돼. 세상엔 회색지대라는 게 있어.”
그렇다. 세상은 원래 그런 곳이다. 선과 악, 빛과 어두움이 혼재混在한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마저 그렇게 살아야 할까. 우리는 세상에 보내는 그리스도의 편지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흑백논리로 살지 말라는 것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자를 찾는 사단마귀의 세력을 그대로 두고 그에 따라 살라는 말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트렌디함을 좇아라
한때 영적 부흥이 트렌드였던 적이 있었다. 그걸 풍자한 것이 버트 랭커스터 주연의 엘머 갠트리라는 영화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요일이면 성경책을 들고 교회 출석하는 것이 모던과 착실함의 상징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도 그런 트렌드는 하나님을 만날 기회를 제공한다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그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역사를 돌아볼 때, 하나님을 무시하고 대적하는 것이 훨씬 많다. 아니, 거의 다다.
고대 인신공양이 트렌드였던 적이 있었다. 자기 자식이나 돈 주고 산 아이를 산채로 우상에 바치고 일신의 영달을 비는 기복행위다. 인간으로선 상상하기도 어렵지만, 그 흔적은 아직도 남아있다. 메소포타미아의 그모스가 그리스로 건너가 크로노스가 되었고, 그걸 중간에서 전달한 페니키아 영향권에선 그 유적이 속속 발견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미신으로 치부하고 인간의 이성을 말하지만, 그 상징은 또 미네르바로 삼는 계몽주의가 있었다. 미네르바는 아테나에 해당하는 로마의 지혜의 여신이다. 어떤 것이 미신인가.
그것은 68 혁명으로, 실존주의로, 자유주의 신학으로 이어졌으며, 반전과 페미니즘, 히피 무브먼트, 명상, 성에 대한 인식 혁신, 그리고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에 닿아있다.
모두 언뜻 좋아 보이는 것들이다. 눌린 것들에게 자유를 주고, 전쟁에 있는 곳에서 평화를 노래한다. 편견과 차별을 없애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올바름은 사라지고 정치만 남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제 사람들은 그 트렌드라는 것들이 혼란과 갈등의 수단임을 깨달아가고 있다.
기타
기타 소소한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MBTI나 각종 매체에서 은근히 흘리는 메시지 등이다.
사실 MBTI는 마이어스와 브릭스가 칼 융의 심리 유형론을 토대로 만든 성격검사 도구로 사람 성격을 16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흔히 ‘중국의 포춘쿠키나 다름없다, 현존하는 최악의 성격검사’라고들 한다.
그런 혹평과는 반대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하다. 유튜브는 그에 대한 영상으로 넘쳐나고, 기업 인재채용에 도입되기도 했다. 내가 느낀 MBTI의 순기능은 ‘아, 이 사람이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하고 이해하는 것 까지였다. MBTI로 보는 궁합, 만나선 안 될 사람, 직업 등등은 나가도 너무 나가 미신에 가까워지기까지 했다.
사실 이런 자기 보고식 심리검사는 피검자가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그 정확도가 천차만별이다. 솔직하지 못하다거나 자기 자신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의 검사는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올 수 없다. 실제의 자기와 보여주고 싶은 내가 마구 섞이기 때문이다.
각종 매체에서 은근히 흘리는 메시지들이 있다.
드라마나 영화, 소설, 웹툰을 보면 모태솔로는 지질하고, 잘 나가는 사람은 몇 명씩 애인이 있다. 착실한 사람은 지고지순한 연애를 한다. 하지만 남녀가 사귀면 육체관계는 필수로 진행되는 걸로 묘사된다. 심지어 인터넷 코미디 방송에선 선섹후사라는 말을 유행시키기까지 했다.
잔혹한 폭력은 미화되고, 맘몬 신은 모든 인간 위에 군림한다. 북한 사람은 미남 배우가, 남한 사람은 연기파(미남은 아닌) 배우가 맡는다. 어떤 악역이든 나름의 서사를 부여한다.
뉴스는 이미 반기독교 정서로 넘쳐난다. 사이비종교나 이단의 범죄사실을 보도에 ‘목사, 교회’라는 용어는 그들을 기독교로 오인하게 만든다.
기독교가 ‘개독’으로 불리게 된 데는 기독교인들의 탓이 가장 크다. 한편, 교회는 물질이든 심령이든 가난하고 못난 사람, 죄인, 아픈 사람의 모임이다. 하지만 사회는 기독교인이 성인 聖人이길 요구한다. 또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가르침으로 교회에서 하는 각종 선행이나 구제활동은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좋지 않은 일은 잘 드러나기 마련이다.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다.
광고에서도 자기를 믿으라고 한다. 아디다스는 ‘널 믿어, You Got This’ 캠페인을 통해 압박감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믿으라고 전한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내가 아니다.
영화 Madi in Heaven 에선 “If you don’t know where you’re going, it no matter what road you take it.”라고 말한다. 갈길이 정해지지 않았더라도 어디든지 가라는 것이다. 하지만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이런 것들을 통해 사람들은 일종의 집단 최면에 걸린다. 영화를 볼 때면 팝콘을 먹어야 하고, 기독교는 더 나쁘며, 하나님을 믿느니 자기 자신을 믿고 차라리 명상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게 낫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동일한 흐름을 자연스럽게 추구하는 집단적 현상을 집단최면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린 이미 집단최면에 걸려있다.
성경은 그런 집단최면, 시류에 휩쓸리지 말라고 한다. 더 나아가 거기서 벗어나라고 한다. 거센 탁류 끝은 멸망으로 향하는 소용돌이며 폭포다.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 살 길이다. 거기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노아의 때와 롯의 때
노아 때 사람들은 비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 시절 비가 쏟아지고 홍수가 날 거란 경고를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겠는가. 손가락질과 멸시는 당연하다. 때론 핍박을 당할 수도 있다.
롯의 때, 소돔은 악행이 극에 달했다. 고초를 당한 사람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닿았고, 성적 문란은 자기 동네에 나타난 천사와 동성애를 한 번 즐기려고 롯의 집 대문을 두드려 열고 드잡이질을 할 정도였다.
롯과 그 딸은 소돔성에서 피신할 수 있었으나, 거기 물든 딸들은 아버지를 인사불성으로 취하게 하고 동침해 자녀를 낳았으니, 시류에 물드는 것은 쉽고 벗어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느낄 수 있다.
시류에서 벗어나기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벗어나기란 어렵다. 용기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다. 순간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기에 더 힘들다. 노아는 그 시간을 방주를 만드는 내내 120년 동안 견디고 버텨야 했다.
혼자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함은 물론이다. 또 믿음의 동역자가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롯이 살던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실 때 롯을 거기서 구출해 내신 것은 아브라함을 생각하셨기 때문이다(창세기 19:29). 아브라함은 롯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께 다섯 번이나 조건을 바꿔가며 여쭸다. 기도의 힘은 놀랍다.
한편, 롯이 소알을 거쳐 산으로 가는 대신 자신을 끝까지 놓지 않고 구하기 위해 애썼던 아브라함에게로 갔으면 어땠을까? 그 딸들도 정상적으로 결혼하고 죄 짓지 않고 살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소돔의 문화에 물들어 오히려 아브라함의 집에 악영향을 미치고 말았을까?
맺는말
지금의 바로 노아와 롯의 때와 같은 바로 그때가 아닌가. 지금이 바로 은혜받을 만한 때가 아닌가. 깨어 기도할 때가 아닌가.
함께 읽으면 좋은 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의 끝은 어디, 잘못된 PC주의가 만들고 있는 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