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2장 여호와를 버리고

오늘 주일예배때 읽은 성경 말씀은 ‘사사기 2장 11절부터 15절’까지였다. 그 중에 중요하게 다가온 것은 ‘여호와를 버리고’라는 부분이었다. 사사기는 여호수아가 죽고 나서 왕정이 시작되기 전, 이스라엘이 12지파로 이뤄진 공동체로 운영되는 시기가 기록된 책이다.

사사기 2장 여호와를 버리고

사사기 2장 여호와를 버리고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 곧 그 사방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아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여 그들로 노략을 당케 하시며 또 사방 모든 대적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치 못하였으며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사사기 2장 11절~15절)

여호수아가 살아있는 동안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섬겼다. 하지만 여호수아가 110살에 죽고, 세월이 흘러 같은 시대를 살던 사람들도 다 세상을 떠나게 되자 하나님을 하나도 모르는 세대로 교체가 되었다.

이게 문제였다. ‘잘’ 섬겼는데 어떻게 다음 세대가 하나님을 알지 못할 수 있었을까. 불과 한 세대만에 애굽의 압제에서 벗어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 독립해 살기까지 입은 은혜를 모를 수 있을까.

하나님의 은혜도 모르고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그 다음 세대는 하나님이 버젓이 보고 계시다는 것도 모르고 그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다.

게다가 ‘버렸다’는 그냥 모른다거나 잊어버려서 놓치게 되었다는 소극적 의미가 아니다. 이 버렸다는 말엔 자기 스스로의 의지와 적극성이 들어있다. 그런데 이사야서를 보면, 똑같은 일이 약 300년 뒤에도 되풀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한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이사야 1장 4절)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하나님을 사사기 때처럼 아예 잊어버린 걸까?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종교’생활은 더욱 흥왕했다. 아래 말씀을 보면, 수양의 번제, 살진 짐승의 기름, 수송아지나 어린양, 수염소의 피등 제물이 무수히 많았다. 분향도 빠지지 않았고, 월삭(매월 초에 드리는 제사)이며 안식일은 물론이고 특정한 날에는 함께 모여 금식기도까지 드렸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가증히 여기시고 견디지 못하겠다고 하신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이사야 1장 11절~13절)

그것은 13절에 나오는 것처럼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 때문이었다.

중립지대란 없다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죽음을 택한 옛 조상들을 우리는 안다. 세상 임금에 대해서도 그럴진대, 하물며 하나님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마태복음 6장 24절)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의 우상을 섬겼다(사사기 2장 11절).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우상 취급하고 자기 욕심을 채우는데 이용했다. 그 결과 그들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게 되었다(이사야 1장 15절)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마태복음 12:30)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반대편에 선 것이라고 하신다. 중립지대란 없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 사랑은 불붙듯 하다. 사랑의 첫번째 특징은 뜨겁다는 것이다.

불은 뜨겁다. 차갑거나 미지근한 불은 없다. 그렇다면 그 불은 꺼진 불이다. 사람의 몸은 일정 온도를 유지해야 한다. 우리 영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성격이나 기질에 상관 없이 기본적으로 유지해야 할 온도가 있다.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막힌 마음(마태복음 13장 22절)을 뚫고 내 진심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이 그 시작이라 할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본분이다.


이 글은 2024년 9월 29일 내수동교회 주일설교 ‘그리스도인의 본분 4, 뜨거움’을 듣고 적은 글입니다. 설교 본문 내용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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