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로 돌아오게 하는 자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야고보서 5:19~20)

야고보서는 고난을 만난 성도들이 기도와 간구로 그것을 통과해 풍성한 삶을 얻기를 권면하는 글이다. 그런데 야고보서 맨 마지막 문장(5:19~20)을 읽어보면,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진리로 돌아오게 하는 자

나 개인이 미혹의 길에서 돌아설 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진리로 돌아오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것의 반대는 진리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살려주는 영

살려주는 영이 되신 예수님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린도전서 15:45)

부활하신 주님은 ‘살아나신’ 것뿐 아니라 ‘살려주는’ 영이 되셨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

하늘에 속한 우리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고린도전서 15:48~49)

우리는 아담처럼 흙에 속했지만, 동시에 하늘에도 속해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살려주는 영이 되어야 한다. 내가 구원받아 사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능동성, 생명의 속성

진리로 돌아오게 하는 자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다. 생명에는 능동의 기운이 들어있다.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고, 하나님께 물들게 된다. 자연스럽게 능동적, 적극적으로 되어간다.

살아있는 것과 주검을 비교해보자. 생명이 없는 것의 체온은 주위 온도와 같다. 수동성은 죽은 것의 특징이다. 살아있는 것은 덥든 춥든 주변의 영향을 받지 않고 스스로 조절하려 애쓴다.

육체뿐 아니라 정신적, 영적인 것도 그렇다. 근래 남의 말에 영향을 자꾸 받게 되었다면, 내게 문제가 생긴 것으로 봐도 된다. 건강하지 않고 생명력이 약해져 수동적이 된 것이다. 환경에 눌려서는 안 된다.

생명력 가득한 신앙

기도하는 사람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가까워지면서 자연스레 생명력이 넘치게 된다. 살리는 영이 되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3)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시편 3:6)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기다 영적으로 살아나 깨우쳤을 때 쓴 시편이다. 빌립보서도, 이 시편 기자도 생명력 가득한 신앙인의 모습이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

내가 하나님께 받은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그냥 사랑이 아니다. 피치 못하게 할 수 없이 우리 죄를 사해주신 것이 아니다. 너무나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공격적인 사랑이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로마서 11:29)

우리가 아무리 속을 썩여도 후회하지 않으신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누가복음 15:20)

아버지의 사랑은 찾아온 아들을 그저 ‘받아준’ 사랑이 아니었다. 오기 전부터 밖에 나가 찾고 기다렸다 달려가 목을 안고 입 맞춘 사랑이었다. 그런 사랑을 받은 우리가 소극적일 수 있을까. 없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누가복음 15:4)

그 사랑은 찾도록 찾아다니는 사랑이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호세아 11:8)

놓을 수 없는 사랑, 긍휼이 불붙는 그런 사랑이다. 이런 사랑이 어떻게 그저 소극적으로 받아주기만 하는 사랑인가.

그런 사랑을 받은 자의 모습

내 눈으로 잠들게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아니하기를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하였나이다 (시편 132:4~5)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기까지 자지도 졸지도 않겠다고 결심하는 다윗이다. 누가 시켜서 한 결심일까. 순전히 자발적인 결심이 아닌가.

우리는 생명을 가졌다. 뒤로 물러나 침윤에 빠져서는 안된다. 제자리걸음이나 뒷걸음질 쳐서는 안된다. 준비가 안되었다고 예배를 드리지 않거나 목자 생활을 못해선 안된다. 오히려 그럴 때에는 더욱 앞으로 나아가 힘을 얻어야 한다.

초대교회 때 돌았던 전염병


2세기, 초대교회시대, 로마전역에 당시 인구 1/3이 사망할 정도로 대단한 전염병이 돌았던 적이 있었다. 믿지 않았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병자들과 가까이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당시 기독교인들은 오히려 병자들을 돌보고 죽은 이들은 매장하는 등 봉사에 힘썼다.

놀라운 결과가 있었다. 환자를 멀리했던 이교도들의 사망률이 높았던 반면, 환자와 접촉하고 봉사에 힘썼던 기독교인들은 그 비율이 현저히 낮았다. 영적인 생명력과 육체적 면역력이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도와 주시나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마태복음 13:12)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도와주시는가. 애쓰는 자가 살아난다. 있는 자는 부하여지고 없는 자는 빼앗기는 영적 부익부 빈익빈은 생명력의 문제다.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진리로 돌아오게 하는 자, 하나님은 그런 자를 도우신다.


이 글은 2019.5.12. 내수동교회 주일설교 ‘적극적 영성, 공격적 신앙-박지웅 담임목사’을 듣고 나름대로 요약, 정리한 글입니다. 본문 텍스트나 동영상 자료가 필요하신 분께서는 링크된 페이지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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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맺는나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 10:10)' 고백의 기쁨을 함께 누리고자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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