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시편 107:9)
시편 107 사모하는 영혼 주린 영혼
시편 107 사모하는 영혼 주린 영혼 / 부모라면 누구나 자식이 잘되길 바라고, 최선을 다해돌본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무소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가 되셔서 불철주야 나를 돌보시며 부족한 것을 채워주신다. 얼마나 감격스럽고 든든한가.
예수님께서도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태복음 7:9~11)’라고 하셨다.

그런데 앞에서 인용한 시편 말씀을 보면, ‘사모하는 영혼’과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고 만족케 하신다. 무엇을 사모하고 무엇에 주린 영혼일까. 한 영혼이 이렇게 간절히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당장 쌀 살 돈이 없어 온 식구가 굶어야 할 처지에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경제문제가 발등에 떨어진 불일 것이다. 아픈 가족이 있다면 병 고쳐 주시기를 간구할 것이다. 그것이 문제인가. 그렇지 않다. 누구나 당면한 문제가 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다.
어린 아기도 마찬가지다. 숨 쉬고 먹고 자는 기능 외에는 무능한 상태로 세상에 온다. 배고파 울고, 기저귀가 젖어 울고, 모든 것에 도움을 구한다. 누군가 다가와 사랑의 손길로 아이를 보살피고, 그것이 반복되는 동안 눈을 맞추고 기뻐 웃으며 서로 사랑하게 된다.
신앙에도 이런 과정이 그대로 적용된다. 처음엔 어떤 문제가 있어 하나님께 나아오지만, 점차 하나님을 알게 되고, 문제보다 하나님께 더 집중하게 된다. 문제가 없어도, 요구할 게 없어도 하나님을 찾고 더 알고 싶어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시편에서 언급한 ‘사모’와 ‘주림’의 대상이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아장아장 걷던 아이가 풀꽃 한 송이를 내밀 때, 부모는 한없이 기쁘다. 뭘 받아서가 아니다. 좋은 것을 봤을 때 나를 떠올려 주었다는 것이 기쁜 것이다. 밖에서 맛있는 걸 먹게 되었을 때, 다음에 같이 와서 먹어야지 하고 생각하게 되는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마찬가지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아쉬울 때만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기쁘고 행복할 때도 하나님이 생각날 것이다. 반대로 뭔가 원하는 게 있을 때만 하나님이 생각난다면, 그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 제물을 바치는 대상을 우리는 우상이라고 한다. 그 관계는 기브 앤 테이크 관계로 성립된다. 따라서 딱히 도덕적이거나 양심적일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우상 취급하지 말자. 바꿔 말해 도구로 삼지 말자. 하나님을 바라본다고 하면서 세상을 바라보지 말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마태복음 6:3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