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고생일까?

인생은 고생일까?

인생은 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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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고생이다

흔히 “인생은 고생이다” 또는 “수생은 고생이다”라고 한다. 수생 受生, 즉 목숨을 받은 게 곧 인생이니, 모두 그게 그 뜻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인생이 고달픈 것 이 과연 하나님 뜻인가. 우리는 결국 그렇게 고생하다 죽으려고 이 땅에 태어난 것인가.

과연 그런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지금 내 처지를 보니 그렇지’라고 생각되다가도 ‘그럴 리 없어. 억울해서도 그럴 순 없어’라고 생각될 것이다. 저절로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원래 누리기 위해 태어난 존재다.

누리기 위해 지음받은 소중한 존재

그 증거가 성경 맨 처음에 당당히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선 인간을 이 땅에 내놓으실 때, 첫째 자기 형상대로 지으시고, 둘째 온전한 세상을 먼저 지으시고 그다음 사람을 지으셨다.

내가 손수 빚은 작품이 함부로 굴러지기를 바라는 예술가는 아무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모든 것은 그저 말씀으로 지으셨어도 사람만은 손수 흙으로 지으셨다. 그리고 자기의 숨결을 불어넣으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세기 2장 7절)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자기를 닮은 자기 자식이 고생하기를 바라는 이는 아무도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형상을 따라 지으신 것은 우리를 귀히 쓰시기 위해서였다. 어디에? 바로 세상을 다스리고 누리라고 그렇게 하셨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장 27~28절)

그런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조금도 고생하길 바라지 않으셨다. 그 증거로 하나님께선 모든 세상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에 사람을 지으셨다. 그리고 세상을 선물로 주셨다.

하나님께선 사람이 혼돈과 어둠 속에 있길 바라지 않으셨다. 아무런 어려움 없이 숨 쉬고 활동할 수 있도록 공기와 물, 빛을 먼저 지으셨고, 먹고살기 위해 아등바등 애쓰지 않아도 되도록 미리 준비하셨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과연 하나님께선 인생이 고생, 수생이 곧 고생이 되길 바라셨을까. 이제 아무도 하나님 뜻이 거기 있다 대답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생이 고생이 된 까닭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 인생은 고되다. 밥벌이를 하려면 아침 일찍 나가 밤이 되도록 땀을 흘려야 한다. 요즘은 그마저도 하기 힘들다.

먹고살기만 힘든가. 그렇지 않다. 태어나 무럭무럭 자라 성체가 된 다음 그 시절을 얼마 누리지도 못하고 급격히 노화가 시작된다. 그 결과, 놀고먹든 벌어먹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다수가 앓다 죽는다.

오죽하면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9988234’가 꿈이라 할까. 복이 많으면 집에서, 그렇지도 못하면 요양병원에서 몇 년씩 고생하다 돌아가시는 걸 보면, 정말 그게 얼마나 간절한 바람일지 알게 된다.

우리에겐 먼 미래의 일 같지만 사실 잠깐이다. 지금 4, 50대인 사람들은 이제까지 세월이 얼마나 쏜살같이 지나갔는지 생각해 보라.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은 더욱 빨라진다.

그런데 이렇게 인생이 고생이 된 까닭 역시 성경 맨 앞에 똑똑히 적혀있다.

수고해야 먹고살게 되었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세기 3장 17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먹을 걸 내어주던 땅은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은 죽을 때까지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

그 이유도 나와있다. 하나님께서 먹지 말아라, 먹으면 죽는다고 했던 나무의 실과를 먹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일을 해야 한다. 세상엔 보람 있는 일이 많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은 힘들지 않다. 가장 힘든 일은 먹고살기 위해 하기 싫어도 꾸역꾸역 해야하는 일이다.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는 먹고살기 위해 고군분투 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하나님과 교제하며 선물로 받은 세상을 누리고 다스리기만 하면 되었다. 단지 나와 세상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만 증명하면 되었다.

그걸 증명하는 방법은 어렵지도 않았다. 그저 지정하신 과일 하나만 안 먹으면 되는 것이었다.

아픔과 죽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기게 된 것은 사기꾼에게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 결과, 먹고 살기 힘들게 된 것뿐 아니라 흙으로 돌아가 죽어야 할 운명이 되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세기 3장 19절)

저주의 몸으로 영원히 사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형벌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저주 아래 놓이게 된 그들이 생명나무 실과를 따 먹고 영생하는 걸 막으셔야 했다.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세기 3장 24절)

쫓겨난 그들은 농부가 되었다. 인류 최초의 직업은 수렵이나 채집이 아니라 농업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창세기 3장 23절)

환경 관리자인 인간이 타락하여 저주 아래 놓이자, 생태계도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뿐일까. 각종 해충과 가뭄, 폭우, 병균, 지진, 방사능 등 지구 환경변화로 인간의 수명은 점점 짧아지게 되었다.

대홍수 이전 사람들은 900살을 넘기는 것은 예사였다. 실제로 아담과 홍수 이후 세대는 단 두 세대밖에 안 된다. 노아가 태어났을 때 아담의 아들 셋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셋이 노아의 8대조였던 걸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다. 21세기에도 고조부는커녕 증조부와 동시대를 살기란 어렵다.

홍수 이후 인간 수명은 급격히 짧아졌다. 노아는 950살을 살았으나, 그 아들 셈은 600살, 그 아들 아르박삿은 438살을 살았다. 그 뒤로 8대손인 데라는 205년, 그 아들 아브라함은 175년을 살았다.

급기야 다윗은 시편에서 ‘우리의 수명이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고 말하고 있다(시편 90편 10절). 조선시대 왕의 평균수명은 단종을 빼고도 47.3세에 불과하다. 한 나라의 왕이 이럴진대, 당시 열악한 의식주, 의료환경에 놓여있던 일반인들은 어땠을까. 35세 전후였을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전쟁과 난리도 한몫했을 것이다.

苦生에서 高生으로

이런 고달픔에서 벗어나 차원 높은 삶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그게 정말 가능하다. 어떻게? 인간이 사기당하고 저주스러운 삶을 살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선 거기서 벗어나는 방법까지 다 마련해 놓으셨다. 그리고는 우리를 초대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세기 3장 21절)

이제껏 멀쩡히 잘 지내던 아담과 하와는 갑자기 자기가 벗었음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세기 2장 25절). 하나님 솜씨에 모자란 게 있을 리 없다. 옷 따위를 더할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완벽했다. 부끄러울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갑자기 수치심을 느끼게 되었다. 죄를 지은 사람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몸에 둘렀다. 하지만 금세 시들어버리는 이파리로는 아무것도 제대로 가릴 수 없다.

인생은 고생일까?
어린 양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사람의 잘못을 가리려면 뭔가 죽어 피를 흘려야 했던 것이다. 이것은 죽기 직전까지 순종한 이삭, 출애굽 때 유월절 어린양, 대 속죄일의 제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어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번에 자기를 드리심으로 한 영원한 제사를 완성하셨다. 우리 몸값을 치르셨다.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제 더 이상의 속죄나 희생은 필요 없다.

우리는 그저 모든 일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까지 이기시고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믿기만 하면 된다. 그러기만 하면 苦生이 高生으로 바뀌게 된다.

대체 그 ‘믿음’이란 게 무엇이기에 우리의 운명을 바꾼다는 것일까? 어떤 모임에 들려면 그 모임과 뜻이 맞아야 한다. 믿음이란 하나님과 뜻을 같이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사람을 의인이라 한다. 하나님의 뜻이 그의 뜻이 되고, 그의 뜻이 하나님 뜻이 된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그 사람 안에도 하나님이 계신다. 그가 바로 복이 있는 사람이고, 그게 바로 구원이다. 苦生이었던 인생이 高生으로 바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로마서 1장 17절, 하박국 2:4)

참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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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가볍게 쓰려고 시작했던 글이 생각보다 길어졌다. 다른 것도 그렇지만, 죽고 사는 게 달린 인생 문제는 말씀을 빼고는 생각할 수 없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