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9편 다 아시는 하나님

시편 139편 다 아시는 하나님 / 시편 139편 2절은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생각을 다 아신다고 말합니다.

시편 139편 다 아시는 하나님
시편 139편 다 아시는 하나님

시편 139편 다 아시는 하나님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시편 139:2)

1. 믿음

하나님께서는 그런 눈으로 우리에게서 믿음을 찾으신다.

가. 두 렙돈 넣은 과부

예수께서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쌔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마가복음 12:41-45)

부자의 많은 헌금보다 과부의 두 렙돈을 더 많다고 하신 것은 그것이 가진 것 전부라서가 아니다. 그 뒤에 숨은 믿음을 보셨기 때문이다.

나. 300 데나리온 향유를 부은 여인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4:3-9)

사람들이 본 것은 300데나리온이라는 향유의 가치였다. 1데나리온이 일반 노동자의 하루치 일당이었으니, 300데나리온이라면 거의 연봉에 육박하는 돈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사람들이 300 데나리온이라는 돈을 볼 때,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마음을 보셨다.

2. 충성심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옛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그 마음이 주 앞에서 충성됨을 보시고 더불어 언약을 세우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의 땅을 그 씨에게 주리라 하시더니 그 말씀대로 이루셨사오니 주는 의로우심이로소이다 (느헤미야 9:7-8)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충성심을 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며 언약을 맺으셨다.

가. 십일조를 바칠 때

아브라함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노략물 중 일체 1/10을 멜기세덱에게 나눠줬다. 이것이 최초의 십일조다. 더구나 그냥 1/10이 아니라 가장 좋은 것으로 골라 1/10을 주었다(히브리서 7:2,4).

나. 아들 이삭을 바칠 때

아브라함은 아들마저 바쳤다. 자세히 살펴보면 묘사된 구절마다 그의 충성심을 발견할 수 있다(창세기 22장).

1) 아침 일찍 출발

3절에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출발했다. 아들을 바치라니, 어떻게 해서든지 시간을 끌어보려 애쓸 만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시간을 늦추는 것은 간접적인 거절이기 때문이다. ‘너는 너의 추수한 것과 너의 짜낸 즙을 드리기에 더디게 말지며(출애굽기 22:29)’라고 했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신명기 23:21)’고 했다.

2) 두 종을 산 아래 두고 올라감

5절에는 산에 올라가면서 오히려 그때까지 따라왔던 두 사환을 기다리라고 했다. 아무리 주인이라고 해도,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는 걸 말리지 않을 수 있을까. 아브라함은 그런 가능성도 차단했다.

3) 이삭을 결박

9절에는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해 장작 위에 올렸다고 했다. 아무리 이삭이 순종한다 해도, 결정적인 순간에 발동하는 생존 본능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런 가능성도 차단하고자 했다.

하나님 뜻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내어놓는 믿음은 역사 이래 아브라함이 유일했다. 하나님은 그 순종하는 믿음과 충성심을 보시고,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을 것(18절)’이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메시아가 날 것임을 약속하신 것이다. 그 약속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승천하셨다.

이삭의 믿음과 순종 역시 못지않다. 당시 이삭은 어린아이가 아니라 장성한 청년이었다. 사흘 길을 걸어 모리아 산에 도착한 다음, 장작을 지고 산을 올랐다. 이 모습에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을 떠올리게 된다.

이삭은 번제할 어린 양을 하나님께서 준비해주실 것이라는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믿었고, 백 살도 훨씬 넘은 노인이 자기를 결박해 장작 위에 올릴 때도 그대로 순종했다. 아버지에 대한 신뢰만으로는 불가능한 순종이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믿음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삭은 평생을 순탄하게 보냈고, 그의 후손에서 메시아가 나오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이삭은 그 이름 뜻 그대로 ‘자식은 부모의 웃음’이 되었다.

3. 맺는말

이상의 내용은 오늘 주일 설교 말씀을 듣고 나름대로 간추린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런 마음을 가진 자를 찾고 계실 것이다. 내게서도 그런 마음을 발견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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