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교사 거짓 선지자의 5가지 특징
거짓 교사 거짓 선지자의 5가지 특징 / 베드로후서 2장은 거짓 교사, 거짓 선지자에 대한 말씀이다. 선지자들이 활동하던 시대에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신약 시대에도 거짓 교사들이 있다고 베드로는 말하고 있다. 거짓된 지도자는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물론이고 재림 때까지 계속 나타날 것이다. 거짓 교사를 분별하고, 또 우리가 이런 자가 되지 않기 위해 거짓 교사나 거짓 선지자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자.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베드로후서 2장 1~3절)

1.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들여옴
참된 지도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말씀을 전한다. 하지만 거짓된 지도자는 그렇지 않다. 대중의 입맛에 맞는 말을 하여 그들을 미혹한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인다.
그들은 신앙인, 그것도 믿음의 지도자라고 하면서도 진리를 믿지 않고 마음대로 재단하고 자르는 교회 밖의 거짓된 가르침을 가만히 끌어들인다. 가만히 끌어들인다는 것은 아닌 척 숨긴 채 들여와 간접적으로 미혹하는 걸 시사한다.
하지만 말씀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베드로후서 2장 20절)라과 했다. 자기 마음대로 취향에 맞춰 필터링하고 취사선택해서는 안 된다. 이런 태도는 자기가 주인이고, 진리 위에 있다 여기기에 나온다.
이런 특징은 공동체 안에서도 드러난다. 교제나 섬김에 있어서도 자기가 주인이어야 한다. 자기가 주인이라는 생각은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들은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한다‘.
사신 주(the Lord that bought them)란 핏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사진 주님,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값으로 산 것(고린도전서 6장 20절)이지 우리 스스로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거짓 교사는 그런 주님을 부인하고 스스로 주인행세를 한다. 아무리 거짓 교사라지만 그들 역시 교회 지도자로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모를 리 없는데도 의도적으로 부인하고 있으니, 반역이 아닐 수 있으랴. 그런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자기가 불러들인 임박한 멸망( swift destruction)뿐이다.
2. 절제 기능이 무너짐 – 호색
2절엔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라고 되어있다. 그들은 성적인 범죄도 나쁠 것 없다며 악한 가르침으로 많은 사람을 현혹한다(현대어성경). 주를 부인할 때 나타나는 증상 중 하나가 절제 기능 상실이다. 여기서 절제란 내 뜻이 아닌 주의 뜻대로 사는 것, 다시 말해 멈추라고 하실 때 멈추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째서 그런가. 진정한 절제란 내가 주인이 아니요,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주인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절제란 호색 같은 부도덕한 일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다(고린도전서 10장 23절). 또 죄가 되지 않는 선한 것에도 적용된다.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 위해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해야 한다고 했다(베드로후서 1장 4~7절).
사람에게는 칭찬받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실 수 있다. 그래서 다윗은 항상 하나님께 먼저 묻고 실행했으며, 바울은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 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린도전서 9장 25절)고 했다.
3. 진리의 도를 비방받게 함
그런데 거짓 교사들은 자기들의 무절제한 탐심의 결과로 ‘진리의 도가 훼방 받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상관하지도 않는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절대 그렇지 않다.
우리의 존재적 사명, 본질적 사명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하나님 백성을 불러내신 이유는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를 통해 보이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나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것은 이미 하나님 형상을 한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담의 죄로 사망이 들어와 우리 안의 하나님 형상이 파괴되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게 되었다. 우리는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한 사람을 준비시키고 그 백성을 불러내셨다. 그리고 죄가 무엇인지,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아담으로 인해 깨어진 것을 회복하고 다시 감당하도록 하셨다. 그런데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드러나고 있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의 이름은 생명보다 소중하다. 언뜻 잘 와닿지 않을 수 있지만 사실이 그렇다. 한낱 우리 인간의 명예와 체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기도문 첫머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로 시작된다. 광야에서 반역한 출애굽 백성들을 모조리 벌하여 없애버리지 않으신 것 역시 하나님의 이름을 열국 앞에서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였다(에스겔 20장 21~22절).
그런데 그런 하나님께서 탕자 된 우리를 기다리시다 달려 나와 맞이하신다(누가복음 15장 20절). 발가벗은 채 십자가에 달리고 온갖 모욕을 다 당하셨다. 그렇게 피로 값을 치르고 우리를 구하셨다. 그리고 결국 죽음까지 이기고 승리하셨다.
이런 하나님의 명예가 내게 달렸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선교적 존재다. 어두운 데 있던 우리를 불러 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는 것(베드로전서 2장 9절), 이 존재적 사명에 정말 두렵고 떨리지 않을 수 없다. 성령 하나님을 보내주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진리, 진리의 도는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이다. 따라서 진리의 도를 훼방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훼방하는 것이다. 거짓 교사는 자기가 反그리스도, 敵그리스도가 되는 것도 모르고 또 상관하지 않는다. 탐욕은 눈을 멀게 한다. 그 결과는 이렇게 무섭다.
4. 탐심 – 중심의 문제
3절을 보면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라고 한다. 다른 번역(현대어성경)을 보면 ‘여러분에게서 돈을 빼앗아 가는 일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입니다’고 되어있다. 여기서 ‘지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라스토이스’는 ‘목적 성취를 위해 조작한다’는 뜻으로, 여기서만 나오는 말이다.
거짓 교사는 무절제한 호색(2절)에 이어 그릇되고 조작된 가르침으로 교인을 속여서까지 재물을 탐하는 특징을 보인다. 탐심으로 가득 찬 거짓 교사에겐 사랑이 없다. 그들은 교인의 유익이 아니라 자기 유익을 구한다.
거짓 교사는 말을 지어낸다. 포장은 합리적이고 그럴듯하다. 하지만 그 속내는 교인들을 속이기 위한 것이다. 한마디로 교언영색 巧言令色인 것이다. 이런 거짓 교사의 중심에는 탐심이 양심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습관이 잘못들면 양심을 속이고 마비시켜 탐심으로 대체될 수 있다. 무뎌지는 것이다.
그들은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베드로후서 2장 14절)’이며, ‘양심에 화인을 맞아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디모데전서 4장 2절)’이다.
5. 심판을 믿지 않음
3절에는 탐욕으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인들로부터 돈을 갈취한 결과가 나와 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심판이다.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고 했다.
‘지체하지 않는다’는 것은 멈추지 않고 계속 작동하지 않는 때가 없었다는 뜻이다. ‘자지 아니한다’는 것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하나님(시편 121편 4절)께서는 늘 깨어 계셔서 간과하지 않으심을 의미한다.
악인은 형통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편 73편을 보면 악인은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늘어만 간다(12절). 심지어 그들은 죽는 때도 고통이 없고 건강하다(4절). 시편 기자도 이걸 보고 거의 실족할 뻔했다고 한다(2절). 하지만 그들의 결국은 멸망과 심판이다.
하나님께선 그 무엇도 간과하지 않으신다. 로마서 3장 25절을 보면,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나와 있으나, 이 ‘간과하심으로’는 잘못된 번역이다. ‘이전 시대에 죄지은 자들을 벌하지 않았던 것도 실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들의 죄를 없애 주실 때를 기다리신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공정하신 분입니다(현대어성경)’라는 의미다.
다시 말하지만, 공의의 하나님께선 간과하지 않으신다. 우리들의 죄를 눈감아주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신자들이 다시 심판받지 않는 것은 이미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지셨기(심판받으셨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우리 죄를 묵인하거나 눈감아 주신(간과해주심)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심판은 반드시 있으며, 어떤 죄든 그냥 넘어가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
그러나 거짓 교사,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철저히 부인하고 믿지 않는다. 또 믿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이렇게 분명한 심판과 멸망(그것도 자기들이 자초한)도 애써 잊으려 한다.
맺는말
거짓 교사, 거짓 선지자들은 옛날부터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주님 오시는 날까지 계속 나타날 것이다. 거짓 교사 거짓 선지자의 5가지 특징은 무엇인가. 그들은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들여와 하나님을 부인하고 멸망과 심판을 자초한다. 또 그 중심에 하나님과 진리가 없고 탐심과 무절제만 가득하여 호색하고 이익만 추구한다. 그들은 코 앞에 닥친 심판과 멸망도 부정하고 다른 교인들까지 끌어들이며 하나님을 훼방한다.
이런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아차 하는 순간 물들기 쉽다. 좋은 것은 배우기도 어렵고 습관들이기도 쉽지만, 나쁜 것은 금방 배우고 빠져들기도 쉽다. 우리 안의 죄성 때문이다. 우리는 타락했다 구원받은 존재들이나, 아직 남아있는 죄 된 본성은 쉽사리 거짓 교사의 가르침을 따라가거나 거짓 교사의 길을 걷게 만들게 한다. 늘 깨어 기도하고 선한 싸움에서 승리해야 하는 이유다.
1월 마지막 주, 새벽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번 주 성경 말씀이 바로 베드로후서 2장 말씀이었다. 한 주간의 말씀을 정리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