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

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

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

얼마 전에 뉴욕에 헤르메스가 산다는 책을 읽고난 감상을 올렸다. 그 책을 읽고 있는 도중 선물 받은 책이 있는데, 바로 지금 소개하는 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 이란 책이었다. 부제는 ‘하나님 자리를 훔치다’ 고, 원래 제목은 Counterfeit GODS니 ‘가짜 신들’정도 되겠다.

‘뉴욕에 헤르메스가 산다’ 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만들어낸 신 -가짜 신, 우상-이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살아 남은 모습을 찾아 탐험에 나선 책이라면, 이 책은 그런 외형적인 가짜 신을 만들어낸 우리 내부의 진짜 우상에 대해 살피는 책이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내 안팎의 우상을 점검해 보는 시간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1. 프롤로그 – 우상,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사람들은 우상이라고 하면 눈에 보이는 신상이나 거기 절하는 원시인을 떠올린다. 하지만 고대로부터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어떤 문명사회에서든 우상은 있었다. 구약시대에는 바알과 아세라, 신약시대에는 아데미(아르테미스), 아덴(아테나), 쓰스(제우스)가 그 모델이다.

현대사회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마음은 우상공장이다. ‘저것만 있으면…’ 하는 것이 우상이고 그것을 위한 모든 것이 우상숭배다. 오랫동안 간절히 바라온 소원, 사랑, 돈, 뭔가 이뤄내는 것, 권력, 문화나 종교…무엇이든 우상이 될 수 있다. 모든 것에 다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던 고대인의 만신주의(萬神主義)와 뭐가 다른가.

현대사회는 지극히 비종교적인 것 같지만 실은 각종 우상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 거기서 해방되는 길은 참 하나님을 회복하는 것 밖에 없다.

 

2. 평생소원 – 오랫동안 간절히 바랬던 것

평생을 바친 꿈이 있는가. 오랫동안 간절히 바랄수록 우상이 되기 쉽다. 모든 불임 부부와 마찬가지로 아브라함과 사라는 평생동안 자식을 바랬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후로 거의 포기할만큼 오랜 세월이 지나 나이 백살이 되서야 겨우 이삭을 낳았다. 그렇게 귀한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요구하셨고 아브라함과 이삭은 순종했다.

아브라함이 얼만큼 당신을 사랑하는지 모르셔서 시험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시험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시험을 거침으로 단련되어 강하고 순수해진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욥기 23:10)

 

3. 사랑 – ‘로맨틱한 사랑과 섹스’의 노예가 되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을 대 얻었던 초월성과 의미를 섹스와 사랑을 통해 찾고자 헤매다닌다(어네스트 베커). 누군가 너를 사랑하기 전에는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등의 노랫말들은 사랑으로 자기 존재의미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보편적인가를 보여주는 증거다.(우리말 노래가사로는 어떤 것이 있나 궁금해 찾아봤다. ‘그대없이 난 아무것도 아니다’라든지, ‘널 알기 전 두렵던 사랑이란 감정.. ‘등의 노랫말을 찾아볼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연인, 애인, 배우자를 찾는 동시에 자기에게 ‘신’의 역할을 해줄 사람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사귀기 시작한 순간에는 행복의 절정에 있는 것 처럼 굴다 어느 순간 ‘속았다’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 같은 배우자를 기대하고 하는 결혼이니 실망할 수 밖에 없다.

배우자나 애인을 덜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알고 더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럴 때 오히려 나의 숨막히는 기대로부터 연인이나 배우자가 해방되고 더욱 행복하게 된다.

성경 속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야곱이다. 애정이 늘 모자랐던 야곱은 라헬에게 반해 7년을 바쳤지만 제 꾀에 빠져 다시 또 7년을 노예처럼 일해야 했다. 라헬은 과연 그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었을까?

야곱이 라헬을 연애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달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년을 봉사하리이다.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칠년을 수일 같이 여겼더라.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창세기 29:18, 20~21)

 

4. 돈 – 탐욕

자기 탐욕은 보이지 않는다. 탐욕이 무서운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사람은 자기를 늘 자기보다 더 잘 사는 사람과 비교하기 마련이다.

사람에겐 표면적 우상(수단)과 근원적 우상(욕구)가 있다.

표면적 우상(수단) 근원적 우상(욕구)
돈, 섹스, etc. 안전, 보호, 통제, 미모, 인맥, 권력…

겉으로 보면 표면적 우상만 드러나지만, 사실 그것은 안전을 보장하고 남을 통제하는 등의 근원적 우상(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일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표면적인 우상만 없애서는 해결되지 않는다. 마음속 깊숙한 곳에 있는 근원적 우상이 해결되어야 한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바로 복음을 믿는 것이다. 날 부요케 하시려고 가난해지심 예수님을 생각하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고린도후서 8:9)

삭개오는 여기서 탈출했다. 돈과 다른 모든 걸 맞바꾼 인생에서 은혜를 깨닫고 자기의 부를 희생해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다. 돈을 구주로 섬기던 그가 예수님을 섬기자 돈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돈은 나쁜 것이 아니다. 선을 행하고 사람을 섬기는 도구다.

5. 성취 – 그 어떤 성공신화도 인간의 한계를 넘을 수 없다

성취는 ‘나는 누구인가’, ‘내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가’,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같은 문제의 답이 될 수 없다. 처음 성공했을 때는 행복감이 확 밀려오지만 금새 사라지고만다.

성공이 우상이 되었다는 몇가지 징후

  • 성공이 가져다주는 (거짓된) 안전감
  • 자기 능력을 부풀려 보게 됨
  • 자기 분야에서 정상을 지키지 못하게 되면 삶에 대한 자신감조차 잃게됨

예수님의 구원은 힘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연약하고 모자라다는 것을 인정해야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1:27~29)

나아만과 여종의 하나님의 차이

아람(시리아)의 군대장관이자 국무총리 나아만은 용맹과 부가 하늘을 찌르는 사람이었으나 나병에 걸렸다. 그의 많은 성취도 그를 구할 수는 없었다. 답은 왕실도 고관대작도 아닌 이스라엘에서 끌려온 어린 여종이 쥐고 있었다.

그 여종의 권유대로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 엘리사에게 가기로 했다. 하지만 곧장 가지 않고 관습대로 자기의 임금을 거쳤다.아람 왕은 이스라엘 왕에게 선물과 함께 편지를 보냈다.

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 문둥병을 고쳐주소서 (열왕기하 5:6)

뇌물을 쓰고 압력을 가하고 신의 비위를 맞춘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일상적인 도리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인간에게 놀아나지 않는다. 치성을 드리면 받고 보답을 하는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모두 ‘은혜’다. 삯군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왕은 이것을 알고 있었기에 ‘내가 하나님이냐, 어떻게 능히 사람을 죽이며 살릴 수 있으랴’고 옷을 찢으며 괴로워했다. 그는 아람왕이 이를 구실로 시비를 거는 줄 알았다.

뭘 이뤄야 구원 받는 것이 아니다. 이룬 것이 없는 시시한 인생이라고 낙심할 것도 없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따로 있다.

 

6. 권력 – 권력의지는 두려움의 또 다른 얼굴이다

정치지도자를 메시아로 보고 정책을 교리로 여길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정치활동은 종교로 변한다. 정치가 우상이 되면 내가 만든 가짜 신이 위협받을 때 두려움으로 공황상태가 되고 상대방은 악마가 된다. 권력을 신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도 답이 될 수 없다. 이념이 실패한 가장 최근의 사레는 공산주의다. 다수의 서구 사상가들은 소위 ‘과학적 사회주의’에 100년 가까이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2차세계대전이 끝나면서부터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될 때까지 그들의 신념은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마르크스주의에 암시되어 있고 버나드 쇼가 명시했으며 현대 심리치료에서 주장하는 관점에 따르면, 악은 환경의 부산물이며 따라서 환경을 통해 악을 고치고 심지어 없앨 수도 있다. 그러나 (나치와 스탈린 주의가 저지른 만행과 2차세계대전으로 보건대) 그런 관점은 너무 얄팍하여 용인될 수 없다. …. 우리 좌파가 늘 실망하고 또 실망하는 이유는 바로 원죄의 교리를 버렸기 때문이다. (‘The Recovery of Belief’, C.E.M. 조드 – 불가지론 철학자에서 기독교로 돌아옴)

사람들은 각자 세계관에 따라 삶의 근본문제와 해답을 다르게 본다.

세계관 근본문제
플라톤, 그리스철학 육체와 정욕
루소, 낭만주의 자연과 구별된 문화
심층심리학 국가와 가정의 제도적 권위
하이데거, 엘륄 과학기술, 관리기업

성경적 세계관에서 삶의 근본문제는 죄이며 유일한 해답은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다. 세상사람들은 근본문제를 죄 아닌 다른 것으로 보고 해답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서 찾는다. 오로지 성경만이 창조세계의 일부를 악당이나 구주로 삼으려는 모든 신호를 단호히 거부한다.

현대인의 위험한 신관 – 도덕주의적 치유의 이신론

권력과 통제에 중독되는 것은 하나님관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 신을 만들어내면 내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사회학자 크리스천 스미스는 ‘도덕주의적 치유의 이신론’ 으로 미국 젊은층의 그릇된 하나님관을 설명하고 있다.

  • 하나님은 착하고 점잖게 살려는 이들을 복주시고 천국으로 인도하신다 – 도덕주의적 신념
  • 삶의 목표는 희생과 자기부인이 아니라 행복과 좋은 자아상이어야 한다 – 치유의 신념
  •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세상을 창조하시긴 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딱히 개입하실 필요가 없다 – 이신론

어떤 문화든 하나님을 몰아내다시피 하면, 사람에 따라 섹스와 돈, 정치가 그 빈자리를 채운다. 우리 정치 담론이 갈수록 이념화되고 양극화 되는 것도 그때문이다. 초당파적 제휴 부족으로 보기도 하지만, 그 뿌리는 훨씬 깊어 태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치유하는 것 뿐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 모델을 찾을 수 있다. 바로 바빌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이다.

바빌론 제국은 기원전 6세기, 앗시리아와 이집트를 누르고 세계를 지배하는 강국으로 등장했다. 느부갓네살왕은 바빌론의 최고 권력자였음에도 극심한 두려움과 불안으로 불면증에 시달렸다. 두려움에서 태동한 권력은 다시 더 큰 두려움을 가져온다. 차지한 사람은 잃을 것이 많아지면 더 두려워지는 법이다.

신상에 관한 꿈(다니엘서 2장)과 소가 된 꿈, 나무 그루터기 꿈(다니엘서 4장)을 꾸고 실제로 바닥까지 내려가는 경험을 하고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었다. 교만이 죽고 자기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고백했다.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경하였노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니라

(다니엘 4:34, 37)

인간이 인간 이상의 신처럼 되려하면 오히려 인간이하로 추락한다. 교만한 사람은 인격자가 아니라 약탈자가 된다. ‘내려가는게 올라가는 길이고 올라가는게 곧 내려가는 길’ 이라는 말이 맞다.

 

7. 문화와 종교 – 은혜 없는 복음은 가짜 하나님을 만든다

사랑, 재정적 형통, 정치적 성공… 이런 개인적 우상은 어렵지 않게 눈에 띈다. 그러나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면서도 더 깊이 숨어있는 우상이 있다. 바로 문화와 사회의 우상이다.

수익 극대화에만 힘쓰는 경영, 가족과 가문을 절대가치로 떠받들던 전통사회, 교리나 은사가 하나님 자리를 차지한 교회는 보이지 않는 우상숭배다. 우리를 몰아가는 각종 우상은 복잡하고 다층적으로 깊숙히 숨어있다.

우리는 물고기 뱃속에서 살아난 사나이 요나를 안다. 우여곡절 끝에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바빌론의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에 이르시기를 원하시고(디모데전서 2:4) 세상 모든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복을 받을 것(창세기 22:18)이라고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그 ‘세상 모든 민족’에서 니느웨 사람들은 빠지기를 바랬다. 하나님 뜻을 알면서도 그래서 가기 싫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요나 4:2,3)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박넝쿨도 네가 아꼈는데, 하물며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백성이 십 이만명이나 되는 큰 성읍 니느웨를 아끼는 것이 어떻게 합당치 않겠냐고 하나님께서는 반문하셨다.

요나서는 그걸로 끝이다. 요나의 다음 말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나는 요나의 침묵에 회개가 포함되어 있기를 바란다.

책의 저자는 그걸로 끝나는 이유를 요나 대신 우리가 서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 질문이 또 다른 요나인 우리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 사랑하기 힘든 사람들을 위해 변화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참된 요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한다고 말한다.

 

7. 제자리를 찾아서 – 전인격이 예수 복음을 통과해야 한다

방마다 구석마다 우상이 세워져 있다.

-데이비드 클락슨 (17세기, 목사, 영국)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보다 자기 지혜를,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갈망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 평판을,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인간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우상을 뿌리 뽑을 수는 없지만 대체할 수는 있다. 그냥 뽑으면 되살아난다. 하나님을 내 안에 모셔야 한다. 하나님은 차선책이 아니다.

야곱은 도덕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이익에 대해서는 교활하고 사랑에 대해서는 미련하게 살았다. 하나님 없이 살던 우리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을 붙잡았고 하나님께 매달렸다. 그 결과 하나님과 함께하는 복을 받을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직접 바꿔 주셨다. ‘발 뒤꿈치’라는 뜻의 야곱에서 ‘하나님과 겨뤄 이김’이라는 이스라엘로 바뀐 것이다. 하나님께서 져주신 것이다. 정말 강한 자가 약자에게 져줄 수 있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라디아서 4:6)

아들과 레슬링하다 져주는 아빠처럼 야곱과 씨름하시던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져주셨다. 이제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아빠(Abba)’ 라고 당당히 아이처럼 부르도록 허락하셨다. 성령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를 퇴치하는 묘약이다. 야곱처럼 엉뚱한 데서 복을 구하며 살던 우리가 연약함을 체험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복을 누릴 때 우상에서 해방되고 참된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다.

 

8. 에필로그 – 가짜들에게 결별을 선언하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로마서 1:21~23)

우상숭배는 많은 죄 중에 하나가 아니다. 인간 심령의 근본 문제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은 우상을 만들어내고 수 없이 많은 죄악을 양산해낸다. 우상숭배는 영적인 간음이다. 따라서 육체마저 성적으로 타락할 수 밖에 없다(로마서 1:26~27). 그 외에도 우상숭배로 인한 합당하지 못한 일의 목록은 대단하다(로마서 1:28~32). 여기서 벗어나는 사람이란 없을 것만 같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로마서 3:10)’고 했다. 다윗도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편 14:1)’ 라고 했다.

십계명이 우상숭배를 금하는 명령으로 시작되는 이유는 그 계명을 어기지 않고는 다른 계명도 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우상숭배는 하나님 외에 다른 것(나를 포함하여)을 섬기는 일이다. 선악과 사건 이후로 인간은 끊임 없이 우상을 섬겨왔다. 따라서 인간의 문화란 우상숭배와 관련되어 있을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신 것은 이런 세상에서 하나의 모델을 삼아 그를 통해 다른 모든 민족이 구원의 복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지 그들만 구원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나아와 자녀가 되는 길을 끊임없이 가르쳐주고 계신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마태복음 4:17)

회개는 기쁨을 가져온다. 기쁨 없는 회개는 절망에 이르고, 회개 없는 기쁨은 얄팍해서 잠깐의 감동 외에 깊은 변화를 주지 못한다.

우상을 버리기 위해 우상이 되었던 자녀나 배우자를 버려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자녀나 배우자, 가정, 직장을 덜 사랑해야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면 그런 것들의 노예가 되어 집착하지 않는다.

우상이 되는 것들 자체는 거의 다 선하다. 그래서 우상으로 삼기도 쉽고 버리기도 어렵다. 하나님이 일순위가 되었다가 다시 뒤바뀌는 일은 허다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평생이 걸릴 수도 있다. 우리는 선한 싸움에서 항상 승리해야 한다.

 

열매맺는나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 10:10)' 고백의 기쁨을 함께 누리고자 글을 씁니다.

반갑습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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