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 그리스도인, 크리스티아노이: 그리스도의 종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우리는 스스로를 가리켜 기독교인, 영어로는 크리스천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말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이 영광스러운 이름이 원래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조롱으로 사용하던 표현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오늘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의 유래와 사람들이 무엇때문에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했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기독교인이라는 말의 유래

사실 기독교인이라는 표현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기독교(基督敎)의 ‘기독’이라는 말 자체가 중국어로 번역하면서 나온 말이기 때문입니다.
17세기 중국에서는 ‘크리스토스(Χριστός)’를 ‘기리사독(基利斯督, 북경어 발음:지리쓰두 Jīlìsīdū)’으로 음역했는데, 앞글자와 마지막 글자를 따서 기독이라고 줄여 불렀던 것이죠. 그리하여 그 종교를 기독교, 믿는 사람들을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메시아의 뜻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들은 이 글을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 메시아라는 의미

2.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된 때는?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사도행전 11:25-26)

맨 처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바로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파되면서 안디옥 교회에 이르러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지요.
사실 맨 처음 기독교는 나사렛파라는 유대교의 한 분파로 출발했습니다. 예수님 부활 이후에도 여전히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고 유대교의 율법과 절기를 지켰습니다.
그때까지도 복음은 유대인 내부에만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은 부정하다는 고정관념 때문이었죠. 하지만,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박해(AD34년경)로 성도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면서 이방인에게까지 흘러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베드로의 환상과 이방인 고넬료의 회심으로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 선교를 공식적으로 승인하게 되었습니다(AD40년경).
스데반 순교 등 박해의 주동자였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회심을 하고, 안디옥 교회를 거점으로 적극적으로 이방인 전도를 수행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생긴 것은 바로 이때입니다.(AD 43년경)

3.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의 뜻과 유래

그리스도인(Christians)이라는 말은 헬라어 크리스티아노스(Christianos, Χριστιανός)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리스도(Christos)에 속한(ianos) 사람이라는 뜻이죠.
그런데 이 말은 원래 노예와 해방 노예 중심으로 이뤄진 황제의 인력을 가리키던 카이사리아노이(Kaisarianoi)라는 말에 빗대 만든 말로, 크리스토스의 종, 도당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비아냥거리는 경멸적인 의미였지요.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노예(둘로스, doulos)는 제국 운영의 실질적 업무를 맡았던 계층이었습니다. 때로는 자유민보다 더 큰 권력과 부를 누리기도 했습니다만, 그 법적 신문은 어디까지나 노예로 생사여탈권은 그 주인에게 속한 일종의 ‘재산’이었습니다.
빌립보서 4장 22절에 나오는 ‘가이사의 집 사람들’은 바로 이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 빌립보서 4:22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

그런데, 이 둘로스라는 말이 번역될 때 household, servant 등으로 번역되면서 그 의미가 퇴색된 감이 없지 않습니다. 그에 대한 견해가 궁금한 분은 다음 글을 참고해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 Grace to Korea

4.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의 종이 되길 바라는 까닭은?

그런데 초대 교인들은 이런 경멸어린 표현을 오히려 영광스럽게 여겼습니다. 

  • 베드로전서 4:16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뿐만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를 바라고 목숨조차 아끼지 않았습니다. 

  • 사도행전 15:25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 하였노라
    여기서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다’의 원래 뜻은 ‘목숨을 걸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왜 예수님께 목숨을 걸었을까요? 

가. 예수님께서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our Lord Jesus Christ|)’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주(主)라는 말은 단순히 주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아래 표 참고).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성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들은 목숨을 걸었던 것입니다.

기독교인, 그리스도인, 크리스티아노이: 그리스도의 종
Lord의 의미 변천 (주일설교자료 캡쳐이미지)

나.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심에도 자기를 낮추시고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놓고 순종하셔서 구원을 이뤄주셨습니다.

  • 빌립보서 2:6-7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다. 부활 승리하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내놓으셨을뿐 아니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이 삼켰으나 소화하지 못하고 졌습니다. 죽음보다 위에 있는 분은 오직 한분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진정 하나님의 본체(本體)십니다.
여기서 본체는 헬라어로 모르페(morphe)로, 단순히 겉모습이 아니라 내적 본질, 형태, 성질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은 외형뿐만 아니라 내면과 본질이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즉,  부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일한 신성(Divinity)을 소유하신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라. 영적 전염성

안디옥 교회 사람들은 하나님께 목숨을 건 바나바와 바울의 가르침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전염병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가는데 마다 사람을 전염시켜 거룩한 성도로 만드는 특성이 있습니다. 

  • 사도행전 24:5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근주자적 근묵자흑(近朱者赤 近墨者黑)이라는 말처럼 어울리는 사람의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 고린도전서 15: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5. 결론 : 종, 섬기는 자

종은 섬기는 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이 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된 자로서 가장 첫째가는 의무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 마태복음 22:37-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이를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본이 되기 위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고대 유대 사회에서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는 것은 가장 비천한 노예가 하던 천한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이방인 노예에게만 강요되고 유대인 노예에게는 시키지 않을 정도 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내려놓은 권위를 나는 움켜쥐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게 됩니다.
  • 요한복음 13:14-15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글은 2026. 4. 19, 26 내수동교회 주일설교를 듣고 나름대로 정리한 글입니다. 설교 본문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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